미합중국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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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농부의 아들에서 변호사로

'존 애덤스'는 1735년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중 하나인 메사추세츠의 브레인트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할아버지인 '헨리 애덤스'는 영국 에식스주의 브레인트리에서 농부로 살았는데, 그는 1632년경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하였으며, 새로 자리잡은 곳이 메사추세츠의 브레인트리가 되었다. 존 애덤스의 아버지도 그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도 농부였으며, 교회의 집사이기도 했다. 또 구두수선공이었으며, 지역 민병대의 부관에 세금징수원, 그리고 브레인트리의 일종의 마을회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부유한 집안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히 넉넉한 집안이었으며, 상당히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했던 것 같다. 존 애덤스도 이런 성실하고 근면한 아버지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존 애덤스는 6세때부터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농부가 되기 위해선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고, 무단 결석을 하는 등 상당히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그러나 존 애덤스의 아버지는 그가 농부가 아닌 성직자가 되길 원했기 때문에, 그에게 성실하게 교육 받을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1751년에 16세가 된 존 애덤스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여 교육받았고, 이때부터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758년에 하버드를 졸업하면서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듬해인 1759년에는 정식으로 변호사 자격을 얻어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영국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는데, 1765년에 시작된 '인지세법'에 대한 반대투쟁을 시작하면서 정치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5년 뒤인 1770년에는 반대로 '보스턴 학살'에 연루된 영국군 군인들을 변호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는데, 그는 훌륭하고 공정하게 무죄를 받아내었고, 일부 살인죄가 인정된 군인들도 정당방위로 무죄방면되었다. 당시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서 진행된 학살사건의 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변호사로서의 신념에 따라 임했으며, 동시에 재판의 결과에 따라 영국 정부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무력개입 할 수 있는 여지를 배제할 수 있었고, 후에 그는 당시 자신의 변호에 대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최선의 행동 중 하나였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곧이어 그는 메사추세츠의 의원이 되었는데, 당시에 이미 변호사로서 상당한 명성을 쌓았으며, 그가 이 사건에 대한 변호를 맡은 것도 적잖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미국 독립 전쟁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는 등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의 갈등의 골은 계속 깊어졌고, 이듬해인 1774년에 영국의 이러한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불편한 대우에 대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각 식민주의 대표들이 모이는 '대륙 회의'가 개설되었으며, 존 애덤스도 메사추세츠의 대표 중 한명으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식민주들은 서로 간의 단결력을 확인하였지만, 영국 국왕에게 보낸 항의 서한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이듬해인 1775년에 '렉싱턴 콩코드 전투'가 벌어지면서,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본격적으로 영국에 대한 독립 전쟁에 들어가게 된다. 이 해에 열린 제2차 대륙 회의에서는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본격적으로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행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대륙 회의는 계속해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1776년에 '미국 독립 선언서'를 채택하면서, 존 애덤스도 여기에 서명하였다. 그는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90여개의 위원회에 참석하였고, 그 중 25개의 위원회 의장으로 근무하였으며, 대륙군에 대한 보급품, 군수품, 전술 등 다양한 방면에서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하여, 길게 일 할때는 하루 최대 18시간 정도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또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지에서 외교적 활동도 이어나갔다.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미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사실상 미국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1782년 존 애덤스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파리에 파견되었다. 이듬해인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영국에게서 완전한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후 존 애덤스는 미국의 영국 대사로서 영국왕 '조지 3세'와 알현하는 등 한동안 영국에서 생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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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초대 부통령

1788년 존 애덤스는 메사추세츠로 귀환하였고, 이듬해에는 미국 최초의 대통령 선거가 열릴 예정이었다. 여론은 사실상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는 것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존 애덤스는 그의 주요 경쟁자 중에 한명이기도 했다. 1789년 첫번째 선거에서는 예상대로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두번째로 많이 득표한 존 애덤스는 법에 따라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존 애덤스는 부통령으로서 상원을 주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그는 연방주의자로서 반연방주의자들과 크게 대립하였다. 1792년에 열린 두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도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존 애덤스는 다시 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 시기에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성공하면서 미국에서도 연방주의자와 반영방주의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격화되었고, 1793년에는 '제1차 대불동맹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였는데,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한 영국은 미국 상선을 나포하는 등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결국 미국은 영국에 굴복하여 1794년 '제이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로서 영국과의 관계는 안정되었지만, 대신 독립전쟁 때 도움을 준 프랑스에 대한 배신에 가까운 행동이었기 때문에, 이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97년 세번째로 치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워싱턴이 '고별사'를 발표하는 등 출마를 거절하였고, 상당히 치열하게 진행된 선거 결과 존 애덤스는 가장 많은 득표를 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두번째로 많이 득표한 부통령이 그의 정적이자 반연방주의자였던 '토마스 제퍼슨'이었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 임기내내 부통령의 견제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1796년에는 제이 조약에 대한 반발로 프랑스에서 신임 대사의 부임을 거부하는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였으며, 이듬해인 1797년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낸 미국 대표단에 대해 거액의 뇌물과 차관을 요구하는 'XYZ 사건'이 발생하면서, 프랑스와 미국의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어, 1798년부터 약 2년간에 걸쳐 정식적인 전쟁은 아니지만, 두 국가간에 해상에서 산발적인 무력충돌이 계속되는 '유사전쟁'을 치루기도 하였다. 또 이때 영국에 이어 프랑스의 지나친 간섭에 경계하면서 외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색출하는 '외국인법'을 제정하여, 국민들의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지나친 조치는 반연방주의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800년 존 애덤스는 프랑스와 휴전하기로 하였고,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과 협상하여 '몰트퐁텐 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이 해에 존 애덤스는 최초로 '백악관'에 입주하기도 하였다. 존 애덤스는 유사 전쟁과 외국인법 등으로 인기를 잃었고, 유사 전쟁에 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증세하면서, 1799년에는 증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1800년에 치루어진 네번째 선거에서 존 애덤스는 3위를 하여 낙선하였고, 대통령에는 토마스 제퍼슨이, 부통령에는 '에런 버'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1801년 존 애덤스는 임기 종료 하루 전에, 새 대통령인 제퍼슨을 방해하기 위하여 연방대법원의 판사들을 전부 연방주의자로 앉혀버리기도 하였다.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은 소위 '헌법 재판'이라는 절차가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은퇴와 말년

존 애덤스는 대통령직에서 은퇴한 후에 메사추세츠로 돌아와 농사에 전념하며, 틈틈히 자서전을 집필하는 작업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자서전을 출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매우 장수하였는데, 1824년에는 치루어진 선거에서 아들인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도 직접 보았으며, 이듬해 90세의 나이로 58세의 아들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노년에는 토마스 제퍼슨과도 화해하여 자주 서신을 주고 받기도 했다고 한다. 존 애덤스는 미국이 독립한지 50년이 되는 해인 1826년에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토마스 제퍼슨도 같은 날 사망하였다. 여담이지만 존 애덤스는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으며, 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당시 미국에서 노예 제도를 본격적으로 폐지 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인 메사추세츠에서 노에제를 폐지하는 것에 만족하였다고 한다. 1780년 존 애덤스가 작성한 메사추세츠주의 헌법에서 노예 제도를 없에버렸으며, 이때부터 메사추세츠주는 노예제도가 없는 소위 '자유주'에 해당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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