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장렬천왕 「부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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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대진 건국과 찬탈

'부견'(苻堅)은 337년경 '후조'의 장수였던 '부웅'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웅은 후조의 유력자였던 '부홍'의 아들인데, 이들은 본래 티베트계인 '저족' 출신으로 후한 말 어지러워진 중원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오호십육국시대'에 '흉노', '선비', '강', '갈'족과 함께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다. 부홍은 본디 '포홍'으로 '포'()성을 썼는데, 당시 항간에 떠돌던 예언인 '초부응왕'(草付應王)에 따라 '草'자와 '付'자를 합쳐 '부'(苻)성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부견이 태어났을때 등에 붉은 글씨로 초부응왕이라고 써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부홍이 후에 왕을 칭하면서 성을 바꾼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부견은 어릴때부터 남달랐는데, 그는 다른 평범한 저족들과 다르게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영특하였기 때문에, 부홍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후조 말기인 350년경 부홍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조에서 독립하였지만, 얼마안가 독살당하였다. 이후 부홍의 세력을 이어받은 장남 '부건'이 351년 '장안'을 점령하였으며, 관중과 하남 일대를 장악하고, 스스로 '천왕'을 칭하며 '대진'을 건국하였다. 이 나라가 '전진'이라고 불리는 국가이며, 부건의 동생인 부웅도 '동해왕'에 봉해져 승상의 자리에 올랐고, 부견은 당시 14세의 나이에 불과하였음에도 전투에 참전하여 '용양장군'의 작위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전진은 일대를 평정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하는 동안 '동진'이 쳐들어오는 등 위기를 겪었다. 부웅은 동진의 군대를 격퇴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등 활약을 하였지만, 354년 이 과정에서 급사하였다. 이듬해 부건도 사망하면서, 전진은 아들 '부생'이 이어받았다. 그런데 부생은 천성이 포악하여 폭정을 일삼아 신하들이나 백성들을 함부로 죽였다고 한다. 그러던와중 357년에는 부견의 형인 '부법'을 의심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부생의 시녀 중 한명이 몰래 이 사실을 부견 형제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에 부견 형제는 '수광정변'을 일으켜 부생을 축출하고, 부견은 스스로 '대진천왕'이라고 칭하고 전진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정통성이 없는 부견이 군주의 자리를 찬탈한 것이기 때문에, 부생의 행적을 과장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철저한 능력주의와 덕치

부견은 철저한 능력주의자였던 것 같은데, 한번은 부견이 신하들과 함께 한고조인 '유방'의 무덤을 지나가다가 신하들에게 유방의 일등공신이 누구인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신하들은 일반적인 대답으로 '소하'와 '조참'이 일등공신이라 답하였는데, 부견은 거기에 덧붙여서 '진평'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진평은 능력은 매우 뛰어났지만, 그의 탐욕스러운 모습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는데, 부견이 굳이 진평을 거론한 것은 자신은 도덕심이나 청렴함이 부족하더라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높이평가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부하들에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357년 부견은 '왕맹'을 소개받았는데, 왕맹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삼태기를 엮어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학다식하며 병서를 좋아했으며, 기개가 높고 도량이 있는 대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부견은 왕맹의 출신을 개의치않았으며, 그의 능력이 출중함을 보고, 마치 유비가 제갈량을 대하듯 우대하였다고 하는데, 왕맹은 부견이 전진의 군주가 되자 승진을 계속하여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또 부견은 수도인 장안에 '태학'을 세워 학문을 널리 진흥시켰으며, 스스로도 매달 직접 태학에 행차하여 학생들에게 시험을 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사로잡은 적장이라도 능력이 있는 자라면 벼슬을 주고 데려와 신하로 삼았다. 358년에는 병주 일대에서 '장평'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부견은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고도, 장평과 그의 아들 '장자'에게 벼슬을 내리고, 그들을 장안 인근으로 데려와 살게 하였다. 이 장평은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부견의 행동에 감명받아 충성을 바쳤으며, 전장에서 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부견은 유교를 숭상하였는데, 이 때문이 일종의 덕치를 기반으로한 통치방식을 행한 것 같은데, 그는 주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민족들의 나라를 멸망시키고도 그 지배계층을 벌하지 않고 사면하였으며, 오히려 벼슬을 주고 장안 근처로 이주시켰다. 또 반대로 자신과 출신이 같은 저족들은 적극적으로 지방으로 이주를 시켜, 여러 민족들이 어우려져서 함께 평등하게 사는 나라를 목표로 한 것 같다. 이것이 그의 천성에서 온 것인지, 학문적인 성취에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때때로 지나쳤기 때문에 왕맹을 비롯한 신하들의 강경책에 나서기도 하였고, 후에 부견이 몰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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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 평정

부견은 능력중심으로 인재를 모집하였고, 덕분에 왕맹을 비롯한 한족 출신들이 참모로 대거 고위직에 등용되었다. 이러한 기조는 그가 통치하는 동안 계속되어, 선비족의 '모용수'나 강족의 '요장' 등 적이었지만 능력있는 자들이 장수로 등용되었다. 덕분에 조정에서 기득권층이었던 저족의 유력 가문들을 견제할 수 있었고, 왕맹 등은 부견의 친척 등 왕권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자들을 적극적으로 견제하여, 천왕의 지위를 공고히하여 조정의 내부를 다졌다. 또 상업을 제한하면서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고, 황궁에서부터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며,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구휼에 신경쓰는 등 민생을 다독이고 농지를 늘리며 전체적으로 전진의 국력 향상을 위해 힘썼다. 부견은 유교 이외에 불교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372년 부견이 파견한 승려 '순도'가 고구려에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계속 혼란한 시기를 겪었던 중원에서 이러한 부견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노래하였다고 한다. 전진은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원을 평정하기 시작하였는데, 366년에는 동진의 형주를 공격하고, 군을 농서에 파견하여 현지의 세력가였던 이엄을 생포하였다. 367년에는 전진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황족인 부씨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5공의 난'이라고 한다. 부견은 한때 궁지에 몰리기도 하였지만, 왕맹과 장자, '등강' 등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여 전진 내부를 아우를 수 있었다. 369년에는 동진이 '전연'을 침공하였는데, 부견은 영토를 받는 조건으로 전연에 지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동진의 군대를 격퇴한 이후 전연의 왕족인 모용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전진으로 망명해 왔고, 전연이 영토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이를 빌미로 전연으로 쳐들어갔으며, 370년에 수도인 '업'을 함락시켜 전연을 멸망시켰다. 이때 왕맹은 모용수의 망명을 받아주지 말 것을 진언하였는데, 사실 이 일로 인해 전연과의 사이가 틀어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련의 일들은 애초에 부견의 의도였으며, 사실 처음부터 전연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견은 사로잡힌 전연의 군주 '모용위'와 황족들을 사면하였으며 장안으로 이주시켜 살게해주었는데, 이렇듯 부견은 호전적이고 야심만만한 면모를 종종보이면서도, 계속해서 덕치에 가까운 적에 대한 관용을 보여준다. 어찌되었든 전연의 영역을 손에 넣은 전진은 명실상부 화북 최고의 세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371년에는 서남쪽의 저족 국가인 '구지'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구지는 전진처럼 저족의 국가였지만 동진의 신하국이었다. 전진은 '취협 전투'에서 구지군에게 대승하였고, 구지는 멸망하였다. 373년에는 동진의 양주자사가 다시 구지의 땅을 공격하였는데, 전진군에게 대패하여 양주를 버리고 익주까지 후퇴하였다. 양주는 전진에게 점령당했고, 부견은 계속해서 익주까지 공격하게 하였다. 동진군에 대승한 전진은 양주와 익주를 얻어 서촉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374년에는 서촉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동진에서도 호응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영주자사인 요장이 동진군과 맞붙어 시간을 끄는 사이, 등강이 반란을 모조리 진압하였다. 동진군은 비록 요장에게 승리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375년에는 부견의 최측근이었던 왕맹이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그는 죽기전에 부견에게 동진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고, 전진 내부의 선비족과 강족들을 견제하며 내실을 다질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부견은 왕맹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였다고 하지만, 왕맹의 유언은 한마디로 따르지 않았다. 사실 부견이 집권한 전진은 여러 개혁적인 부분이나 군사적인 부분에서 왕맹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부견의 대인배적인 덕치성향과 오직 능력만 보는 인재 안목에 대해, 왕맹의 뛰어난 능력과 과단성이 좋은 보완재로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두사람은 유비와 제갈량의 '수어지교'처럼 서로에게 좋은 역할이 되었지만, 물을 잃은 물고기는 철저하게 몰락하게 되었다. 376년에는 서쪽의 '전량'을 정벌하여 멸망시켰고, 하북의 '대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전진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최초로 화북지역을 완전히 평정하였고, 부견은 즉위한지 20년만에 중원에 패자가 되어, 천하통일까지 동진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동진 정벌과 비수 대전

378년 부견은 아들 '부비'를 보내 동진의 '양양'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1년여에 걸친 공방을 거쳐 점령 할 수 있었다. 부견은 기세를 몰아 군대를 보내 '광릉'으로 침공하였는데, 전진의 '팽초'는 '회하 전투'와 '군천 전투'에서 동진의 군대에 연이어 대패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견은 격노하여 팽초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팽초는 두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부견은 이에 더해 원정에 참전했던 지휘관들에게 책임을 물어 모두 평민으로 강등시켰다고 한다. 이전과는 다른 부견의 이러한 감정적이고 무자비한 태도는 그가 몰락할때까지 계속된다. 382년 첫번째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부견은 신하들을 불러모아 대대적으로 동진을 정벌하고 천하통일 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황후와 태자, 부견에게 조언하던 승려나 신하들 모두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수였던 모용수만이 이에 찬동하였는데, 부견은 크게 기뻐하며 모용수에게 상을 내리고, 전진의 병사들이 채찍을 던져넣기만 해도 장강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호언하였다고 한다. 이를 '투편단류'라고 하는데, 부견은 이미 자신의 결론을 정해놓고, 사실상 신하들에게 따를 것을 강요한 것이다. 383년 부견은 '여광'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서역 원정을 명하고, 자신은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모아 본격적으로 동진을 침공하였다. 전진의 기세는 대단했는데, 부견은 동생 '부융'이 수춘을 함락시키자, 비밀리에 그곳으로 이동하면서, 본래 동진의 신하였다가 양양 공격 때 생포하여 신하로 두었던 '주서'를 보내 기세가 꺾인 동진에 항복을 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주서는 부견을 배신하여, 동진의 총사령관인 '사석'에게 부견이 수춘에 있음을 알리고, 오히려 전진군이 다 모이기 전에 빨리 공격하도록 알려주었다. 동진군은 수춘으로 이동하면서, 근방에 있던 전진군을 격퇴하는 등 크게 사기가 올랐고, 이러한 상황을 전혀 몰랐던 부견은 수춘성의 성벽에서 사기등등한 동진군의 기세에 놀라, 인근 산에 있는 나무들까지 병사로 착각하는 등 추태를 보였고, 여기에서 '초목개병'이라는 말이 생겼다. 부견과 부융은 전진군을 이끌고 비수 인근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는데, 전진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있었고, 부견의 잘못된 지휘와 동진군의 높은 사기에 밀려 병사들은 겁에 질렸다. 전진군은 제풀에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비수 대전'에서 전진군은 대패하였으며, 부융은 전사하였고, 부견은 말 한마리에 목숨을 맡기고 도주하였다. 부견이 달아나는 와중에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놀라 불안해 하였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풍성학려'의 유래가 되었다. 간신히 동진군에게서 벗어난 부견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이 전투의 패배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전진의 몰락과 사망

부견은 모용수의 호위를 받아 장안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부견은 반대하는 신하들을 뿌리치고, 모용수가 반란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업으로 가겠다는 요청을 들어주었는데, 사실 부견도 이미 모용수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비수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이미 전진 휘하에 있던 여러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부견은 중원을 평정하면서 멸망시킨 많은 세력들의 지도자들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벼슬을 주고 장안 인근에 거주하게 하면서, 사실상 세력의 일부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여러 민족들의 융합을 도모하는 부견 나름대로의 덕치정책이었지만, 정복당한 이들은 이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부견이 틈을 보이자 일제히 본심을 드러낸 것 이었다. 모용수도 부견에게 목숨을 빚졌기 때문에, 비수대전 이후 한번은 은혜를 돌려주었지만, 384년 이내 반란을 일으켜 '후연'을 세우고, 지키겠다고 나섰던 업을 공격하였다. 본래 전연의 군주였던 모용위는 동생 '모용홍'과 내통하였는데, 모용홍은 반란을 일으켜 '서연'을 건국하였고, 이에 부견은 아들 부예에게 토벌을 명령하면서, 요장에게 보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예는 모용홍과의 전투에서 패해 전사하였고, 요장은 부견에게 죄를 청하며 사자를 보냈는데, 부견은 분노하여 사자들을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요장은 도주하였으며, 이내 강족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후진'을 건국하였다. 부견은 자신에게 적대한 적국의 사람들이나 반란자들에게도 자비로웠다고 했지만, 왕맹이 사망한 이후에는 이러한 충동적이고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모용홍은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치기위해 진군하였는데, 도중에 부하들과의 불화로 살해당했고, 아우인 '모용충'이 이어받았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부견의 아들들이 군대를 이끌고 나갔으나 모두 패배하였고, 결국 요장과 싸우고 있던 부견이 장안으로 다시 돌아오게되었다. 장안은 모용충의 군대에 포위되었고, 385년에는 농서지역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선비족이 '서진'을 건국하였다. 포위가 지속되면서 장안의 상황은 상당히 안 좋았는데, 기근까지 겹치면서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이 와중에 아들 부휘가 모용충을 상대로 번번히 패배하자, 부견은 그에게 매번 패배하면서 살아돌아오면 뭐하냐고 질책하였고, 결국 부휘는 화를 참지못해 자결하기도 하였다. 궁지에 몰린 부견은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에 의지하여 장안을 떠나기로 하였고, 태자 부굉에게 장안을 맡긴 후 가족들과 일부 측근만을 데리고 성을 탈출하였다. 부견은 헛소문을 믿고 '오장산'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진의 군대에게 붙잡혔다. 요장은 부견 일가를 사찰에 감금하여 두고 재위를 넘길 것을 요구하였는데, 부견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사로잡힌 부견은 자신의 딸들이 모욕당할 것을 우려하여, 두 딸을 스스로 살해하였으며, 자신은 요장에 의해 살해당했다. 황후와 어린 아들인 '부선'은 부견이 살해당한 후에 자결하였다고 한다. 당시 부견은 48세로 재위에 오른지 28년 되었는데, 겨우 20여년 만에 천하를 손에 쥘뻔 했던 그는 비수대전에서 패배한지 2년만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요장은 죽은 부견의 시호를 '장렬천왕'이라고 했다고 한다.비수대전 이전에 서역으로 원정을 떠났던 여광은 후에 '후량'을 건국하고 부견을 '문소황제'로 추존하였고, 전진은 부견의 서자였던 '부비'가 이어받아 부견을 '세조 선소황제'로 추존하였다. 장안은 부견이 떠난후 얼마 안되어 함락되었기 떄문에, 태자 부굉은 탈출하여 동진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전진은 약 10여년정도 더 버텼지만, 몰락을 막을 수 없었고, 394년에 멸망했다. 부견의 덕치는 여러민족이 한데 뒤엉켜 다투고 있던 당시 중원에서 필요한 덕목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철저한 능력주의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로 돌아와 등을 찔렀다. 결과적으로 중원의 혼란은 지속되었고, 통일의 날은 멀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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