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반응형

초상화

손꼽히는 수재

'토마스 제퍼슨'은 1743년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인 '피터 제퍼슨'은 '알버마를 카운티'의 대농장주이자 측량기사 였으며, 어머니 '제인 랜돌프'도 농장주의 딸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던 것 같다. 1752년 제퍼슨은 9살때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 같은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4세인 1757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제퍼슨은 이때 약 5,000에이커의 땅과 삼십명 가량이 노예를 상속받았다. 제퍼슨은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학교에 다녔는데, 고전과 역사, 과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1760년에는 16세의 나이로 '윌리엄 & 메리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2년 후인 1762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여러분야에 공부를 지속하였고, 1767년에 버지니아주에서 정식을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생전에 7개의 언어를 구사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상당한 수재였던 것 같다. 그는 바이올린을 연습했으며, '타키투스'와 '호메로스'의 책 같은 고전을 즐겼다고 한다. 또 건축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이 무렵에 자신의 땅에 '몬티첼로'라고 불리는 저택을 세우기도 했으며,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 위치한 이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제퍼슨은 1768년부터 버지니아 식민지의 변호사로서 많은 소송을 도맡아 처리하였는데, 이러한 활약에는 그의 가문이 큰 역할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의 갈등

1769년 제퍼슨은 알버마를 카운티의 대표로 버지니아 자치의회의 의원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식민지와 본국인 영국 사이에서 갈등이 깊어졌는데, 1774년 영국 의회에서 통과된 속칭 '참을 수 없는 법'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법률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과 달리, 제퍼슨은 인권적인 관점에서 비판하였다. 그는 식민지의 시민들에게도 자연권이 있기 때문에, 신민지인이 포함되지 않은 영국 의회에는 식민지의 법을 입법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제퍼슨의 주장은 많은 동조를 얻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급진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에 '대륙 회의'에서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 주장은 미국 독립 이론의 기초가 되는 내용으로, 아메리카 식민지 정치계에 그의 이름을 널리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제퍼슨은 1775년에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 참석하였으며, '렉싱턴 콩코드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영국에 대한 독립으로 방향성이 정해지자, 그는 '5인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미국 독립 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776년 정식으로 미국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한 이후에 제퍼슨은 버지니아로 돌아왔으며, 버지니아주의 하원의원으로 사법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매진하여, 3년 동안 126개이 법안을 작성하는 등 왕성한 입법활동을 하였다. 제퍼스는 평등과 종교의 자유, 교육에 대한 법률에 신경을 썼으며, 인권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사형 판결을 제한하는 법률도 제출하였지만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1779년부터는 버지니아주의 주지사로 재직하였는데, 본래 윌리엄스버그인 주도를 리치먼드로 옮기는 작업을 감독하였고, 윌리엄 & 메리 대학의 교육 정책을 개혁하는데에도 관여하였다. 당시는 이미 미국의 독립 전쟁이 한창인 시기였는데, 1781년에 영국군이 리치먼드를 급습하였다. 이때 제퍼슨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주지사의 신분으로 도망친 행위가 안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이후로 다시는 버지니아의 주지사로 당선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1784년부터는 미국의 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어 프랑스에서 생활하였다. 이 때문에 1787년에 열린 '미국 제헌회의'에 국외에 있던 제퍼슨은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향인 '제임스 메디슨'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 받으며, '권리장전'이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고 한다. 파리에서 제퍼슨은 샹젤리제에 위치한 공관에서 생활했는데, 파리의 살롱 문화를 좋아하였으며, 거리의 유적들과 예술품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또 저명한 인사들의 파티에 자주 초대되었는데, 제퍼슨은 프랑스어가 뛰어났기 때문에 이들과 상당히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때 제퍼슨은 혁명군에 찬동하여 혁명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오랜기간 프랑스 생활을 한 탓인지 제퍼슨은 프랑스에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고, 추가로 와인에 상당히 심취하였다고 한다.

반응형

미합중국의 건국

1789년 제퍼슨인 본국에 귀국했을때에는 이미 첫번째 대통령 선거가 끝나있었으며, 사실상 '아메리카 합중국'은 이미 건국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밑에서 초대 국무장관으로 취임하였으며, 부통령인 '존 애덤스',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국가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이때부터 제퍼슨은 애덤스와 해밀턴과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곧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로 나뉘어 본격적인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독립전쟁 때 생긴 부채를 어떻게 해결하는 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는데, 해밀턴은 연방의 틀에 넣어 부채를 각 주가 공평하게 나누어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퍼슨은 각 주가 스스로의 빚을 알아서 갚아야 한다고 하였다. 사실 해밀턴은 부채가 많은 '뉴잉글랜드' 출신이었고, 제퍼슨의 버지니아주는 부채가 별로 없기도 했다. 여튼 협상은 난항을 겪었고, 결국 해밀턴은 앞으로 건설될 수도인 '워싱턴DC'를 남부에 넘겨주는 대가로 부채를 공평하게 나누기로 타협 안을 내놨고, 이를 제퍼슨이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수도가 현재의 워싱턴DC의 위치가 되었다고 한다. 또 제퍼슨과 해밀턴은 '미합중국 제1은행'을 설립할 때에도 충돌하였는데, 이번에는 워싱턴이 해밀턴의 의견에 찬성하면서 1791년 미국의 첫번째 은행이 설립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연방주의와 반영방주의 반목으로 1792년에 해밀턴과 애덤스가 속한 '연방당'이 창건되었고, 제퍼슨은 '민주공화당'을 창건하여, 두 정치세력은 본격적으로 충돌하였다. 1793년 제퍼슨은 국무장관을 사임하고 몬티첼로로 돌아가 정치활동에 집중하였고, 대신 매디슨이 한동안 전면에 나서 대립을 이어나갔다. 1796년에 시행된 세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워싱턴이 불출마 선언을 하였지만, 대통령은 연방주의자인 애덤스가 당선되었고, 제퍼슨은 차점 득표자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이례적인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대통령과 부통령 조합은 즉시 문제를 일으켰는데, 제퍼슨은 부통령의 위치에서 애덤스의 정책을 사사건건 방해하였다. 특히나 이 시기에 'XYZ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와 '유사전쟁'이 벌어졌고, 또 이 때문에 '외국인 규제법'을 통해 국민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등 여러모로 제퍼슨과 민주공화당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퍼슨과 매디슨은 연방정부는 각 개별 주들이 인정하지 않는 법안을 집행 할 권한이 없다며, 주의 권한을 우선시하는 주장들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애덤스는 자신이 시행한 정책들로 인해 지지를 잃었고, 1800년에 시행된 네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애덤스는 낙선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제퍼슨과 '에런 버'가 동표를 획득해 공동 1위가 된 것이다. 에런 버는 처음부터 해밀턴을 견제할 목적으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당시 선거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따로 출마하는 것이 아니어서, 결국 선거 결과는 하원에서 결정되게 되었다.

미국의 세번째 대통령

제퍼슨은 1801년 36번에 걸친 투표 끝에 미국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03년에 '수정 헌법 제12조'가 제출되게 된다. 어쨌든 에런 버는 이 선거에서 자신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여 제퍼슨에게 대가를 요구하였는데, 제퍼슨은 이를 무시하였고, 부통령으로 별로 할일도 없었던 에런 버는 이후 제퍼슨과 결별하였다. 제퍼슨이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였을때, 워싱턴은 이미 1799년에 사망하였으며, 전임자인 애덤스도 은퇴후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큰 걸림돌없이 정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는 매디슨을 국무장관에 앉히고, '앨버트 갤러틴'을 재무장관에 임명하여, 정부 요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배치하였지만, 온건한 연방주의자들은 그대로 유임시키는 등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제퍼슨은 대내적으로는 작은 정부를 추구하여 여러 세금을 철폐하였고, 연방정부의 세수는 관제 중심으로 충당하였다. 또 후손들에게 부담을 떠넘겨서는 안된다는 기조하에 국채를 줄이는데 노력하였고, 민주 공화국에는 상비군이 필요없다고 여겨 군대를 축소하였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1802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육군 공병사령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워싱턴의 정책을 계승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180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의 영토를 구입하였다. 당시에는 쓸모없는 빈 땅을 거금을 들여서 외국으로부터 사들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당시 미국의 영토는 거의 두배로 늘어났으며, 현대에는 매우 탁월한 선택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노예 무역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는데, 노예 제도를 철폐한 것이 아니라 무역만 금지 시킨 것이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각 주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방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화 및 배척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백인 우월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1804년에 이루어진 선거에 제퍼슨을 재선을 노리고 출마하였는데, 에런 버가 정치적 갈등 속에서 해밀턴과 결투를 신청하여 그를 살해하였기 때문에, 제퍼슨은 에런 버를 비난하였고, 대신 함께한 '조지 클린턴'과 함께 당선되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연방주의자들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하면서 제대로 견제받지 않았는데, 애덤스의 아들인 '존 퀸시 애덤스'가 아예 연방당을 탈당하고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연방주의자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민주공화당도 분열되기 시작하였는데, 온건파 연방주의자들을 받아들인 제퍼슨에 반발한 세력이 탈당하여 새 당을 창당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1805년에 1801년부터 시작된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서, 안정적인 지중해 무역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다시 한번 프랑스와 영국사이에 끼인 형태가 되었고, 영국이 마음대로 미국의 선박이나 선원들을 징집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갈등이 상당히 커졌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아직 약소국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1807년 제퍼슨이 시행한 '출항금지법'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무역금지 등으로 인해 피해를 본 많은 사람들은 제퍼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1809년 임기를 마친 제퍼슨은 버지니아로 다시 돌아갔다.

버지니아 대학의 설립

고향으로 돌아간 제퍼슨은 자신의 평소 신념을 담아 학교 건립에 착수하였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학교를 세우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1819년 마침내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제퍼슨은 건물의 설계부터 직접하였는데, 소위 '연방 양식'으로 불리우는 것으로, 그는 대통령 임기중에도 많은 관공서들을 연방 양식으로 짓기도 하였다. 또 당시 많은 교육기관들이 종교적으로 예속되어있던데 반해,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는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하여 강의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 또한 제퍼슨이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버지니아 대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하는데는 시간이 좀 더 걸려서, 1825년이 되서야 정식으로 개교하여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한 이듬해인 1826년에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지 50년되는 해로, 정적이자 친구였던 애덤스도 같은 날 사망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로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으며, 유명한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에도 새겨져있다. 그는 미국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인권을 존중하였으며, 공화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그리고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것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