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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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독립전쟁 참전용사

'제임스 먼로'는 1758년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의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인 '패트릭 앤드류 먼로'가 스코틀랜드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는데, 아버지인 '스펜스 먼로'는 어느 정도 규모있는 농장의 농장주이자 목수이기도 했다. 먼로는 11세부터 학교에 다녔는데, 농장일을 도와야했기 때문에 1년에 11주만 등교하였다고 한다. 1772년에는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 2년 뒤인 1774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가장이 된 먼로는 16세에 학업을 그만두고 농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먼로는 영국의 '참을 수 없는 법'에 대한 반발로 버지니아 식민지의 총독 관저를 습격하는 등 영국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 당시 자녀가 없었던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 '윌리엄 & 메리 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1775년 '렉싱턴 콩코드 전투'가 벌어지고, 이어서 1776년에 '미국 독립 선언서'가 채택되면서,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이때 먼로는 학업을 그만두고 대륙군에 입대하여 독립전쟁에 참전하였다. 먼로는 학력을 인정받아 중위로 복무를 시작하였으며, 대륙군 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의 휘하에서 '트렌턴 전투'에도 참여하였고, 이 전투에서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 거의 전사할뻔 하였다고 한다. 이후 1778년까지 필라델피아 원정에 참여하거나, '몬머스 전투'에 참전하는 등 군생활을 계속하여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며, 자신이 이끌 연대를 새로 모집하였지만 실패하였고, 그대로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였던 '토마스 제퍼슨' 밑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먼로는 제퍼슨 밑에서 그를 보좌하면서 학업을 병행한 것 같은데, 제퍼슨은 그를 대령으로 진급시켜 민병대를 지휘하도록 시키려고 했지만, 당시 대륙군은 새로운 병사들을 모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병사들에 비해 장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먼로가 실제로 민병대를 지휘하지는 않았다.

변호사이자 정치가

1782년 먼로는 버지니아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1783년부터는 '연방 의회'의 구성원으로서 미국의 건국에 이바지 하였다. 또 제퍼슨 밑에서 배우던 법률 공부를 끝냈으며, 1786년에는 버지니아주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치활동을 그만두지 않았고, 1787년에 버지니아주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계속 활동하였다. 먼로는 1790년에는 버지니아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794년에는 미국의 첫번째 대통령인 워싱턴에 의해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연방주의자들과 반영반주의자들 반목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는데, 먼로는 제퍼슨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의 일원이되었으며, 파리에서도 제퍼슨처럼 프랑스에 상당히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사이에 '제이 조약'이 맺어진 이후, 그는 미국의 프랑스 대사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조약에 대해 맹비난하였고, 이에 유럽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워싱턴은 먼로를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1799년부터 먼로는 버지니아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는데, 1800년 그가 주지사 일때 '가브리엘의 반란'(Gabriel`s Rebellion)이라고 불리우는 흑인 노예들에 의한 반란 시도가 좌절되었고, 이후 이러한 사회 혼란을 막기위해 자유 흑인과 노예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들이 통과되면서 비판받기도 하였다. 주지사 임기를 마친 먼로는 미국의 세번째 대통령이 된 제퍼슨의 요청으로 1803년 프랑스로 건너가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에 대한 협상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플로리다 서부를 매입하기 위해 스페인도 방문하였지만, 이 협상은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후 먼로는 1807년까지 영국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귀국한 먼로는 1808년에 진행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제퍼슨은 자신의 또 다른 정치적 동반자 였던 '제임스 매디슨'의 출마를 지지하였다. 선거 전략상 먼로는 후보자로 출마하지 못했고, 이들과 사이가 상당히 나빠졌기 때문에, 선거에 있어서도 상당히 비협조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먼로는 선거가 끝난 후에 제퍼슨과 화해하였지만, 매디슨과의 사이가 크게 틀어져 그와 한마디도 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1811년 먼로는 다시 버지니아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었지만, 당시 문제가 있었던 매디슨의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 3개월 만에 사임하고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812년에 일어난 '미영 전쟁' 때문에 먼로는 한때 국무장관과 전쟁부 장관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하였지만, 얼마 뒤 미국과 영국은 '헨트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의 종결을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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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5대 대통령

1816년 먼로는 두번의 임기를 마친 매디슨의 다음 주자로 민주공화당에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먼로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을때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시기 였는데, 연방주의자들이 모인 '연방당'은 제퍼슨의 대통령 임기때부터 서서히 분열하기 시작하였으며, 먼로가 임기를 시작하였을때는 그 영향력이 크게 쇠퇴해 있었다. 이 시기 미국은 서부개척과 산업의 발달로 크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내부의 문제들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먼저 민주공화당으로 대표되는 공화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연방 정부의 힘을 제한하고, 각 주정부의 주도로 국가가 운영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였는데, 국토가 넓어지고 주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하나의 주를 넘어 여러 주에 걸쳐 진행되야하는 인프라 사업 등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도로나 운하 같은 이러한 대규모 사업들은 통상적으로는 연방 정부의 통제하에 시행되어야 했지만, 집권 정치세력이었던 공화주의자들은 연방 정부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우려하였고, 각 주들은 이러한 대규모 사업을들 진행하기에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자한 절차를 거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역할과 권한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였다. 다음은 플로리다에 대한 문제였는데, 미국은 자국에 대한 유럽의 위협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또 서부로의 원활한 개척을 위해서도 스페인이 소유하고 있는 플로리다 서부를 필요로 하였다. 당시 플로리다에는 미국과 적대적인 아메리카 원주민인 '세미놀족'과 탈주 노예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지역 장악력이 부족하였던 스페인은 몇개의 요새만을 관리하고 있을 뿐 이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던 미국은 이번에는 세미놀족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서부 플로리다로 쳐들어갔다. 미국은 먼저 세미놀족과 탈주 노예들이 국경을 넘어와서 미국 영토를 약탈하는 것을 진압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무단으로 스페인의 식민지에 쳐들어갔으며, 이후 당시 수도 역할을 하던 '펜사콜라'까지 점령하였다. 이때까지 스페인은 플로리다 서부의 영토를 미국에 매각하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세미놀 전쟁'의 결과, 자신들의 장악력과 대응력이 부족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미국은 염원하던 플로리다 서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1819년에는 경제 공황이 시작되기도 하였는데, 미영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전쟁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과도하게 화폐를 발행한 것과 토지가격의 폭락, 그리고 수출부진으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이러한 상태는 1822년까지 지속되었다. 또 이 해에는 미주리 준주가 정식으로 연방에 가입하는 절차를 밟으면서 노예제에 대한 논란이 다시 점화되었다. 당시에는 북부지역은 대체로 노예를 두지 않는 소위 '자유주'에 해당하였고, 대농장이 기반이 되는 남부주들은 소위 '노예주'로 나뉘어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새로운 미주리주를 노예주로 할 것인지, 자유주로 할 것인지를 가지고 논쟁이 생겼다. 이 논의는 1820년 '미주리 타협'으로 불리는 타협안을 통과시키면서, 결과적으로 노예제도에 대한 문제는 미봉책인 상태로 남겨졌고, 이는 후에 '드레드 스콧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남북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820년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먼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득표를 하며 무난하게 재선에 당선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연방당이 사실상 완전히 와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이 선거의 패배가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연방당은 해체되게 된다. 먼로 휘하의 연방 정부는 외교적인 부분에서의 많은 성과를 얻었는데, '러쉬-베것 협정'을 채결하여 오대호에서의 해군 활동을 제한하도록 하였고, 이후 캐나다 지역과 미국의 국경을 획정하여, 영국과의 사이에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 또 스페인과 협상을 벌여 플로리다 서부를 얻어왔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도 협상을 벌여 북미 태평양 연안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하였다.

먼로 독트린

1823년 먼로는 의회의 신년 메시지에서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먼로 독트린의 내용은 간단히 말하자면 미국은 유럽에 간섭하지 않을테니,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사실 이러한 기조는 워싱턴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는데, 이는 신생국이자, 약소국이었던 당시의 미국에게는 당연히 취해야 할 자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의 열강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의 국력이 상당히 성장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분쟁이 어느정도 종식되면서, 미국도 존중받기 시작하였다. 또 가장 중요한 배경중 하나는 바로 남미에 있던 스페인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시작한 것이었다. 1822년 먼로는 이미 스페인에게서 독립한 아르헨티나, 페루, 콜롬비아, 칠레, 멕시코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먼저 독립한 식민지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기도 했기 때문에, 유럽이 미국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황적으로 철저한 미국 중심주의 이기도 했는데, 유럽이 이미 개척할 공간이 없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식민지를 세우고 있었던데 반해, 미국은 자국의 서부를 개척하는 데에만 집중해도 충분할 정도였다.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먼저 독립한데다가, 체계적인 정부와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미국은 외부세력인 유럽의 개입을 완전히 방지할 수 있는 경우, 필연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먼로가 당시 어떤 생각으로 이러한 내용의 발표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미국은 한동안 자국의 발전에 몰두 할 수 있는 시간을 갖을 수 있게 되었다. 1825년 먼로는 대통령에서 퇴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고, 제퍼슨, 매디슨과 함께 지내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미국의 건국 이전에 독립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연합 회의에서 의원으로 활동한, 소위 말하는 '건국의 아버지'들 중 마지막으로 대통령을 지냈다. 이후 제퍼슨이 세운 '버지니아 대학'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버지니아주 의회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 제퍼슨이나 매디슨과 마찬가지로 은퇴한 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세 사람다 노예주이자, 부유한 농장주 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은 오히려 축소되었다. 그는 많은 빚을 청산하기 위해 부동산을 모두 처분하였으며, 1831년 사망할때까지 딸에 집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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