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한 말기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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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한 왕실의 외척

'왕망'(王莽)은 기주 위군 원성현 사람으로 기원전 45년경 중국의 '전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전건'의 손자인 제북왕 '전안'의 후예라고 하는데, 제나라 사람들이 이 집안을 문자 그대로 '왕가'라고 불렀기 때문에, 후에 성을 전씨에서 왕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왕씨 집안의 '왕금'은 젊은 시절에 법률을 공부하여, 한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일종의 법원 공무원인 '정위사'를 지냈는데, '선제' 때 딸 '왕정군'이 태자 '유석'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다. 그런데 왕정군이 입궁한지 얼마안되어 황손을 회임하였고, 유석이 그때까지 다른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선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이후 기원전 48년 선제 사후에 유석이 즉위하여 '원제'가 되었고, 왕정군은 황후가 되었으며, 아들 '유오'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기원전 33년에는 원제가 사망하고 아들 유오가 즉위하여 '성제'가 되었는데, 이때 왕정군이 황태후가 되면서 왕씨 일가가 대대적으로 관직을 하사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황권이 강화될 수 있도록, 황제의 외척들에게 황제를 잘 보좌하라는 의미에서 관직을 내려 대우하였는데, 왕정군의 동생인 '왕봉'은 '대사마', '대장군', '영상서사'가 되었고, 다른 동생들도 저마다 관직을 받아 왕씨 일가가 조정에 한자리씩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망은 이러한 덕을 크게 보지 못하였는데, 왕망의 아버지인 '왕만'은 왕정군의 동생이었지만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정군은 가난한 왕망과 그의 어머니 거씨를 불쌍하게 여겨 궁에 데려와 살게하였다고 한다. 궁에 살면서 어머니와 고모를 모시게 된 왕망은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틈틈히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또 백부인 왕봉이 병석에 눕게되자 직접 간병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 정성이 지극해서 스스로 약을 달이고 맛을 볼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에 감동한 왕봉은 죽기 전에 누이 왕정군과 외조카 성제에게 직접 왕망을 잘보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덕분에 왕망은 '황문랑', '사성교위'에 임명되었는데, 평소 왕망의 행실을 알고있던, 친척들과 주위 사람들이 앞다투어 성제에게 왕망을 칭찬하였기에, 기원전 16년에는 '신도후', '기도위', '광록대부', '시중'으로 관직이 올라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검소한 생활을 계속하며, 의복과 재물은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배풀었고, 왕망의 명성은 더욱 더 널리퍼졌다고 한다. 또 일찍 아버지를 여읜 조카 '왕광'을 양자삼아 직접 길렀는데, 친자식보다 잘 보살폈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불평할 정도였다고 한다.

서서히 드러나는 본색

왕망은 학문에 힘써 '예기'를 공부하였고, 평소에 검소하고 베푸는 삶을 살았지만, 기원전 8년 사촌인 '순우장'을 모함하여 처형시켰고, 그 공적과 평소의 평판을 이용하여 순우장 대신 대사마의 자리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왕망은 가히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을 정도의 높은 관직에 올라 권력의 중심에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하사받은 재물을 주변에 나누어 주는 등 계속해서 검소한 태도를 유지하였는데, 그의 어머니 거씨가 병석에 눕자 병문안 온 사람들이 변변치 않은 옷차림을 보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착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원전 7년 성제가 사망하였는데, 생전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성제의 조카 '유흔'이 뒤를 이어 '애재'가 되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자 정권의 실세였던 외척 왕씨는 서서히 배제되었고, 대신 애재의 할머니인 부씨 일족과 어머니 정씨 일족이 그 빈자리를 체우게 되었는데, 기원전 5년 왕망도 애재가 할머니 부씨를 '제태태후'로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가 귀양을 떠나야했으며,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왕망의 차남 '왕획'이 노비를 살해하였는데, 왕망이 이를 심하게 질책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왕망은 시중의 평판이 매우 좋았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면해 주도록 계속해서 탄원하였기 때문에, 3년만인 기원전 2년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애재는 왕망이 태황태후가 된 왕정군을 보필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1년에 애재가 후사가 없이 병사하였는데, 서거하면서 자신의 동성애 애인이었던 대사마 '동현'에게 옥새를 맡기었다고 한다. 이에 왕정군은 왕맹을 보내어 옥새를 뺏어오게 하였고, 이를 이용해 애재의 사촌이었던 당시 9세의 '평제'를 새로운 황제로 즉위시켰다. 왕망은 다시 대사마가 되어 실권을 손에 넣었고, 왕정군과 왕망은 부씨와 정씨들을 몰아내고 다시 자신들이 실세로 등극하였다. 1년에 왕망은 '안한공'에 봉해졌는데, 왕정군이 나이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왕망은 이를 핑계로 왕정군을 조금씩 정사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애재 때처럼 평제의 외척들에 의해 실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들이 장안으로 오지 못하도록 배제하였으며, 종국에는 모두 살해하여 멸족시켰다고 한다. 왕망은 많은 유학자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국정을 보았으며, 섭정인 왕정군을 대신하여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대인배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2년에는 전국에 재해가 들자 왕망은 돈 100만냥과 땅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4년에는 평제의 황후를 간택하는 일이 있었는데, 왕정군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자신의 딸을 배제하도록 지시 하였다고 한다. 이때 수 많은 이들이 궁으로 몰려와 이에 반대하였는데, 그 수가 하루에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결국 왕망의 딸이 평제의 황후로 간택되어 '효평황후'가 되었다. 국구(황제의 장인)가 된 왕망은 법에 따라 거액의 금전을 받게 되었는데, 이 때도 왕망은 2억전 중에 4,000만전을 받았으며 3,300만전을 다른 후궁들의 집안에 보내주었다고 한다. 또 이후에 딸인 황후가 2,300만전을 더 지급하자, 그 중 1,000만전은 자신의 친척들 중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이러한 왕망의 행동에 이 해에만 8,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왕망에게 상을 내리도록 평제에게 청했으며, 이듬해에는 무려 480,000여명이 같은 청원을 또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왕망이 뒤에서 꾸민 것으로, 그는 앞에서는 검소하고 청렴한 척하면서, 뒤로는 사람을 시켜 자신의 행동을 부각시키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청원하도록 꾸몄다는 이야기가 있다. 덕분에 왕망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면서도 왕정군과 각을 세우지 않을 수 있었고, 큰 상과 명성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왕망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치켜세우며 세상이 평안하다며 태평성대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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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이라는 이름의 찬탈

5년 14세의 나이로 평제가 사망하였고, 왕망은 2살 밖에 안되는 '유영'을 다음 황제로 내세웠는데, 사실 평제가 죽은 것은 왕망이 자신의 외척들을 모두 모살한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한 왕망이 평제를 독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망은 유영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황제로 즉위시키기 않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섭황제'라고 부르며, 사실상 황제를 대신하였다. 실상 이때 이미 왕망은 직접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 같은데, 그는 위조된 예언서를 만드는 등 자신이 황제가 될 명분을 날조하였고, 종국에는 한 고조의 영혼이 자신에게 선양하였다는 소리를 하였다고도 한다. 8년 유영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선양받은 왕망은 즉위식을 거행하기 위해 왕정군에게 옥새를 받아오도록 시켰는데, 왕정군은 옥새를 주지 않으려고 숨기고서 왕망을 비난하면서 버텼으나, 결국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옥새를 땅바닥에 집어던져 내동댕이치고 쓰러져 울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때 전국옥쇄의 귀퉁이가 깨졌고, 이후에 그 자리를 금으로 때우게 된다. 왕망이 받은 선양은 역사 기록으로 남아있는 첫번째 선양으로, 당시에 왕망은 고대 기록에 있던 선양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이후 유영은 '정안공'에 봉해졌으며, 별도로 신변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으나,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경시제'가 실권을 잡자, 경시제는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유영을 살해하였다.

책의 내용대로 하는 통치

왕망은 젊었을때부터 유학의 '예경'을 공부하는 등 유교적 이념을 중요시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는 '신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자 그에 따라 통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책에 써있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250년 이상 전에 멸망한 '주나라'를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하여 '주관'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통치를 실시하였다고 하는데, 먼저 전국의 토지를 '왕전'이라고 명명하고, 전부 국가에 귀속시켰으며, 당연히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주나라의 관직 제도를 모방하여 제도를 개편하고, 화폐 제도와 조세 제도 등도 주나라의 제도를 토대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제도 자체가 오래되고 복잡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에 맞지 않는 제도들은 오히려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 인접한 이민족 국가들과 갈등을 일으켰는데, 왕망은 서쪽의 '흉노'와 서역 국가들, 서남쪽의 '구정', 동북의 '고구려'와 싸움을 벌였다. 그는 한나라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이민족 국가의 왕들을 '후'로 격하하여 부르며 모욕하였고, 그들이 반발하면 그것을 빌미로 하여 쳐들어갔는데, 신나라의 군대는 많은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승리한 전투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또 왕망은 신선과 귀신을 믿는 등 무속에 휘둘렸고, 많은 돈과 수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궁중에 전각을 짓는 등 국고를 낭비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자신에 대한 평판에 신경을 썼는데, 이를 위해 비밀리에 주변국에게 뇌물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는 시늉을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에 더해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관직을 주고, 마음에 들지 않는 충언하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도 하며, 21년에는 꿈 속에서 한 고조가 나와서 자신을 꾸지람하자, 잠에서 깬 후에 병사들을 보내서 고조를 모시는 사당을 부수게 하였다고도 한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후대에 쓰여진 것들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참작하며 들어야 할 것이다.

신나라의 멸망

결국 이러한 실정에 반란이 일어났는데, 18년에는 산동 지방에서 반란군들은 눈썹을 붉게 칠했기 때문에 '적미군'이라고 불리웠다. 또 22년에는 '녹림군'이 들고 일어났는데, 이들은 기근 등으로 인해 숨어들어 도적질을 일삼던 이들로, 본거지를 '녹림산'에 두었기 때문에 녹림군이라고 불리웠다. 녹림군의 분파중 '평림병'에는 한나라 황실의 일족인 '유현'이 있었는데, 23년 이들은 한나라의 재건을 선포하고, 유현을 황제로 추대하여 경시제로 내세웠다. 왕망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는데, 신나라군은 '곤양대전'에서 '유수'에게 대패하였다. 왕맹은 경시제가 낙양을 함락시키기고, 장안의 코앞에까지 다가왔는데도, 백성들 중에 잘 우는 이들을 뽑아 관직을 주어, 아침과 저녁에 통곡하면서 하늘에 이들을 물리쳐달라고 빌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경시제의 군대가 장안에 진입하자 신나라의 신하들과 병사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왕망은 점을 치는 누대위에서 100만 대군도 물리친다는 북두칠성 모양의 '두병'이라는 물건을 들고 3일간 버텼다고 한다. 이후 상인 출신의 '두오'라는 자가 왕망을 베었고, 그 수급은 '공빈취'라는 자가 취했으며, 주변의 병사들이 공을 다투어 너도나도 달려들어서 사지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신나라는 15년만에 멸망하였고, 이러한 중국에서 왕망은 역적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후에 사람들은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를 일컬어 '망탁조의'라며 대표적인 4대 역적으로 꼽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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