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송의 개혁가, 당송팔대가 「왕안석」
- 역사
- 2023. 7. 17.
5세에 시경과 논어를 깨친 천재
'왕안석'(王安石)은 1021년 중국의 '송나라'(북송)에서 태어났다. 왕안석의 집안은 본래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그의 할아버지대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인 '왕익'은 지방의 하급관료였다. 왕안석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고, 고향에 농사지을 땅도 없었기 때문에, 부친의 근무지에 따라 옮겨다니며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왕안석은 어렸을때부터 그 재능이 특출났는데, 5세 무렵에는 이미 '시경'과 '논어'를 통달했을 정도라고 한다. 왕안석은 어렸을때 시나 지으며 명성을 쌓는 것에나 관심을 두었는데, 1038년 아버지가 '강령부'(현재의 난징)로 전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고, 이때부터 점차 실용적인 학문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령부에 그대로 정착하여 학문에 몰두한 왕안석이었지만, 그가 공부하는 방식은 남들과는 좀 달랐는데, 기본적으로는 서책을 통해 먼저 학습한 후에, 농민이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거나 눈으로 직접 관찰하는 등, 그 내용을 검증하고 확인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또 '유학'에만 치우쳐 공부한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의 다른 학문들도 공부하여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1042년에 왕안석은 과거에 급제하여 21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섬서회남절도판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지방에 부임하였다. 그는 탁월한 지식과 뛰어난 능력으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송나라 황제인 '인종'에게 '만언서'를 올려 개혁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자연스럽게 중앙 관료들의 눈에 띄어, 여러 관료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받기도 하였는데, 경제적 이유 때문에 수입이 상대적으로 많은 지방에서 계속 지냈다고 한다.
왕안석의 개혁
왕안석은 40세가 될때까지 계속 지방에서 근무하였는데, '신종'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자 중앙으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북송은 나라 자체는 평화로웠지만, 내부에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인접국인 '서하'와 '요나라'에 바치는 조공이 문제였다. 송나라는 서하와 7년간의 전쟁을 벌인 후에 화친을 맺었는데, 그 대가로 서하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있었으며, 요나라에도 마찬가지로 화친을 중재한 대가로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또 이러한 인접국의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하며 많은 군대를 모집하였기 때문에, 이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비가 재정의 80%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군대는 숫자만 많았을 뿐 결정적으로 서하를 제압할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꼭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골칫거리가 되었다. 또 3년마다 기계적으로 치루어지는 과거시험으로 관료의 숫자가 폭증하여 관직이 숫자를 넘어설 정도였으며, 대지주와 대상인 등 기득권 세력이 횡포로 민중들은 고통받고, 이로 인한 폐단이 세수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더해 황실에서도 각종 행사를 여는 등 낭비를 일삼았는데, 한마디로 줄이자면 국가 재정의 수입과 지출에 큰 문제가 있었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신종은 이러한 북송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고 싶었고, 이에 따라 지방에 있던 인재인 왕안석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한림학사'의 직위를 내려 개혁을 진행하게 하였다.
신법
왕안석은 6개의 신법을 만들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기본적으로는 기존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해서 재정의 증가와 군사력의 증강을 목표로 하였다. 먼저 '청묘법'은 농민들이 파종이후 수확하기까지 생활하기 위해, 지주와 상인들에게 종자나 식량을 고리대로 빌려서 생활하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당시 농민들이 부담하는 이자가 평균 70%로, 100%를 넘는 경우도 드믈지 않았다고 하는데, 왕안석은 이것을 국가에서 빌려주도록하고, 대신 이자를 20%로 정하도록 하였다. 비슷한 것으로 '시역법'이 있는데, 이것은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자본이 적은 중・소 상인들에게 20%의 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대상인들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 이 법을 통해 '상평시역사'라는 기관을 만들어두고, 물가가 하락하면 가격이 싸진 물건을 수매해 두었다가, 물가가 상승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매매하여 물가를 안정시키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균수법'으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의 운송을 담당하는 '발운사'라는 기관을 두게하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일괄적으로 거두어들이는 현물 조세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역의 특성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부과하는 이러한 현물 조세는 당연히 해당 지역에 큰 부담이 되었고, 이들의 의뢰를 받고 대신 남품해주는 상인들이 중간에서 이익을 가로챘기 때문에, 지는 부담에 비해 조정에서 얻는 이익도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왕안석은 현물 조세의 납부 과정에서 발운사가 중간 상인을 대신하게 하여, 조세 부담을 줄여주면서 상대적으로 조정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한 것이다. 또 이 기구를 통해 불필요해진 물품을 다른 곳에서 고가에 매각하여 부수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모역법'은 노역이 면제되어 있던 관리들이나 사원에 금전으로 세를 부담시켰으며, 대신 그 돈으로 노역에 참여한 이들에게 대가를 지급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통해 참여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였고, 실업자들에 대한 구제책으로 사용하되었다. 마지막으로 '보갑법'과 '보마법'은 군사력 증강을 위한 정책이었는데, 보갑법은 지방의 가구들을 일정 기준에 따라 묶어 일종의 민병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이들은 평시에는 치안을 담당하였고, 전시에는 보조군의 역할로 동원 되도록 하였다. 보마법은 농민들에게 말을 키우게 해, 평시에는 농사를 하는데 쓰고, 전시에는 징집하여 군마로 쓰려는 목적이었다.
신법파과 구법파
그러나 왕안석의 이러한 개혁 조치는 즉시 특권계층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왕안석은 일련의 개혁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이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대거 관직에 기용하였는데, 이를 '신법파'라고 불렀다. 그리고 반대되는 이들은 소위 '구법파'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신종의 어머니인 '선인성렬황후'의 지지를 받았으며, 당대 명사였던 '사마광'이 중심인물이 되었다. 사마광은 북송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보다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왕안석의 급진적인 개혁이 시행되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결국 신종은 이들의 충돌을 막기 위해 사마광에게 일선에서 물러나 역사서를 저술하도록 하였고, 이것이 바로 '자치통감'이다. 그러나 구법파가 단순히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개혁에 저항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왕안석의 신법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왕안석은 시급히 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별다른 검증없이 자신의 개혁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두루 모집하여 썼는데, 이들은 개혁의 내용보다는 그 잿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이를 조사하고 시행하는 동안 여러 창의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각종 수탈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청묘법의 경우 일부지역에서 먼저 시범사업을 시행하였는데, 공을 서두른 나머지 대출이 필요없는 농민들에게도 강제로 모두 참여하게 하였으며, 정책을 시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까지 모조리 농민들에게 부담시켰기 때문에, 농민들이 지역 관리를 찾아가 못 살겠다고 호소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보마법 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농민들이 필요로 하는 짐말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군마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반대되었다. 그외에도 구법파는 신법이 상공인들의 이익을 빼앗는 악법이라고 공격하였고, 당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1074년 기주지역에 큰 가뭄이 들자, 구법파는 이것을 빌미로 하늘이 신법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며 잇따라 상소하였고, 황태후와 내시들까지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자 신법파 중 일부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를 피하려 신법의 부작용을 비판하기에 이르렀고, 왕안석을 천거했던 '구양수'조차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결국 신종은 왕안석을 해밍시킬 수 밖에 없었고, 왕안석은 좌천되어 지방으로 내려가게되었다.
실패한 개혁가의 최후
1075년 왕안석은 다시 복직하였고, 신법이 아직 시행되고는 있었지만, 신법파에는 왕안석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어 사실상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또 이 해에 왕안석의 장남이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24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을 정도로 영민한 인물로, 불과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안석이 크게 슬퍼하였을 것이다. 이듬해인 1076년에 왕안석은 사직을 청하였고, 고향을 돌아가 은거하였다고 한다. 결국 1085년 개혁을 추진했던 신종이 사망하였고, 다음 해인 1086년에는 왕안석도 사망하였다. 그리고 사마광은 신종 사후에 황태후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어 신법을 폐지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도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하지만 이후 즉위한 '철종'이 황태후 사후 친정을 시작하자 다시 신법을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개혁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던 신법과 구법에 대한 논의는 점차 사라지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당파싸움이 계속이어지면서, 점차 북송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