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조조가 가장 아끼던 군사 「곽가」
- 역사
- 2023. 7. 16.
대업을 이루어 줄 사람
'곽가'(郭嘉)는 170년경에 태어났는데, 예주 영천군 양책현 사람으로, 자는 '봉효'(奉孝)를 썼다. 그는 어려서부터 통찰력이 깊고, 원대한 야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후한말 난세가 다가옴을 느끼자, 이름과 행적을 숨기고 돌아다니며, 여러 영걸들과 교재하며 지냈다고 한다. 곽가는 처음에는 사세삼공의 명문인 '원소'를 찾아갔는데, 원소를 직접 본 곽가는 원소의 인물됨에 실망하여 그를 떠났다고 한다. 이때 곽가는 원소의 신하였던, '신평'과 '곽도'에게 원소는 휘하에 가신은 많으나 활용할 줄 모르고, 겉치례만 많고 실용적이지 못하며, 책략을 꾸미기 좋아하지만 막상 결단을 내려 실행하지 못하니, 천하의 패자가 되지 못 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조조' 밑에는 '희지재'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희지재도 곽가와 같은 영천사람으로 책략을 꾸미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어, 조조가 그를 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희지재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조조는 '순욱'에게 희지재를 대신할 수 있을 만한 사람에 대해 물었고, 이에 순욱이 곽가를 추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조조와 곽가가 대면하게 되었는데, 조조는 곽가와 만나 천하의 일을 논한 후에, 곽가야 말로 자신의 대업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며, 곽가 또한 조조야 말로 자신이 섬길 주군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조조는 조정에 표문을 올려 곽가에게 관직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여, 곽가는 '사공군좨주'의 직을 받고 조조 휘하에 합류하였다.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 연의'에 소개된 내용도 이와 비슷한데, 먼저 순욱이 '정욱'을 추천하고, 다시 정욱이 곽가를 추천했으며, 곽가가 '유엽'을 추천했다고 한다. 인재가 인재를 추천하고, 그 인재가 다시 인재를 추천하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다 못해, 넝쿨을 당기니 또 다시 호박이 굴러들어오는 격이라 할 수 있다.
선견지명
원소는 기주, 청주, 병주를 장악하고, '공손찬'을 공격하면서 바야흐로 하북의 패자로 등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조가 장차 자신과 원소가 대결하게 될 것을 생각하여 이에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곽가와 순욱이 원소의 됨됨이를 지적하며 조조가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고, 그러기 위해 원소가 북쪽의 공손찬을 상대하는 사이에 남쪽의 '여포'를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사실 당시에 상황에서 조조의 군세는 원소에 비할바가 못 되었겠지만, 천하를 도모하는 입장에서 능숙하게 주군을 시켜세우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원소를 상대할 수 있도록 발판이 되는 계책을 제시하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여포에게 배신당한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하여 오자, 정욱은 유비도 나름의 패도를 걸으며 주군의 경쟁자가 될 것이미 미리 숙청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곽가는 명성이 높은 유비가 곤궁할때 의지하여 찾아왔는데, 이를 내치면 그 소식을 들은 천하의 인재들의 마음이 조조에게서 돌아설 것이라며 만류하였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서는 곽가도 정욱처럼 유비가 야심도 있고, 세력도 있으니 장차 후환이 될 수 있어, 일찍 조치하여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 전해지는 것으로 말해지는데, 유비를 받아들여 주는 것과 앞으로 신경써서 잘 처리하는 것은 시간차가 있는 다른 내용이기 때문에, 두가지 진언을 다 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유비를 받아주어줬던 조조는 후에 유비를 놓아주는 우를 범하게 되는데, 조조가 유비에게 병사를 주어 '원술'을 공격하게 하자, 곽가와 정욱이 만류하려 하였으나 이미 유비가 출진한 뒤 였다. 결국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게되어 이를 토벌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조조는 원래 잃은 것을 되찾은데 불과하였고, 유비와는 원한만 늘어나게 되었으며, 유비는 살아서 원소에게가 의탁하였다. 이때도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는 사이 원소가 개입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곽가는 원소는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개입하려고 해도 시일을 맞추지 못 할 것이라고 진언하였고, 결과적으로 원소는 유비가 토벌되는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또 그사이 여포를 토벌할때도, 여포가 '하비'에서 농성하였기 때문에 조조는 일단 군사를 물리려고 하였는데, 곽가와 순유가 여포와 그의 군사 '진궁'을 평가하며 시급히 공격할 것을 진언하였으며, 이후 조조군은 수공으로 하비를 공격하여 여포를 사로 잡기도 하였다. 이처럼 곽가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대상을 꿰뚫어보고, 냉정한 판단력으로 상황을 읽어 조조에게 진언하니, 그야말로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겠다.
하북 평정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도, 많은 이들이 강동 일대를 평정한 '손책'이 조조의 근거지인 '허도'가 비어있는 틈을 타 쳐들어 올 것을 우려하였는데, 곽가는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면서 많은 이들을 죽여 원한을 많이 샀고, 자신의 실력을 믿고 무방비하게 돌아다니니 필부에 손에 죽을 것이라며, 크게 개의치 말것을 진언하였는데, 결국 손책은 장강을 건너기도 전에 자객을 만나 죽음을 맞았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마치 예언과 같았던 곽가의 말이 맞아 떨어진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손책을 암살하는 계략은 '진등'이 꾸몄으며, 이 계책이 성공하여 허도가 안전 할 수 있었다고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손책은 이미 강동을 평정하면서 많은 원한을 샀기 때문에, 대군을 이끌고 장강을 건너 허도를 향했다면, 필시 그가 없는 강동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회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조조군이 손책을 우려하여 관도에서 물러났다고 하면, 이후 원소와 손책이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을 가하였기 때문에, 어짜피 선택권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후로도 활약을 계속한 곽가는 원소의 잔당세력을 일소하는 과정에서도 공격을 일부로 늦추어 '원담'과 '원상'이 반목하도록 하여 조조군의 부담을 줄였고, 후환을 없에기 위해 원상이 달아나 의탁한 '오환족'을 공격할 때에도 곽가는 빠르게 진격하여 적을 교란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과연 이 계책을 따른 조조군은 대승하였고, 여기서 '병귀신속'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고 한다.
너무 이른 죽음
곽가는 그 뛰어난 능력으로 조조에게 큰 신임을 받았는데, 조조 휘하에 있던 '진군'이 조조에게 곽가의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여러차례 고발하였지만, 곽가는 이를 알고도 태연자약하며 행동을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조조는 그럼에도 곽가를 총애하여 이를 감싸주었는데, 또 엄격하고 바른 진군에 대해서도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사실 명문있는 가문 출신의 진군이 보았을때, 술과 고기를 즐기며 방탕한 삶을 사는 곽가의 행실은 보기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생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미천한 집안 출신인 곽가의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쓸 만한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조조는 이러한 두 사람의 서로 다름에 대해서도 이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둘 모두 뛰어난 인재로 아껴, 가히 시대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곽가는 오환족 토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풍토병에 걸렸는데, 207년경 조조 휘하에 임관한지 11년만에 38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이에 조조는 크게 탄식하고 슬퍼하였다고 하며, 이듬해인 208년에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하자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또 한번 탄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