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한 번의 전투로 다잡은 천하를 잃은 「비수 대전」
- 역사
- 2023. 7. 14.
화북을 평정한 전진
357년 '저족' 출신의 '부견'은 '수광정변'을 일으켜 '전진'의 3대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한족 출신의 '왕맹'을 중용하여 내치에 신경쓰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성장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후 크게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원 정복을 시작하였는데, 370년에 전연의 수도 '업'을 함락시켜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같은 저족 국가인 '구지'를 멸망시키고, 373년에는 구지 땅으로 쳐들어온 '동진'이 군대를 패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쳐들어가서 양주와 익주를 얻어 서촉 지역을 함락시켰다. 376년에는 서쪽의 '전량'과 북쪽의 '대나라' 멸망시켜, 전진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최초로 하북지역을 평정하였으며, 천하통일까지 오직 남쪽의 동진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동진은 본래 후한말 삼국이 통일된 이후 사마씨가 세운 나라로, 이 시기에는 3차에 걸쳐 북벌을 진행했던 동진의 실력자 '환온'이 사망하기는 하였지만, 재상 '사안'은 북방을 완전히 장악한 전진의 침략을 대비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켰고, 이렇게 단련된 정예병들을 북부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벌의 시작
383년 부견은 본격적으로 동진을 침략하기로 마음먹었고, 많은 신하들이 이에 반대하였지만 밀어붙였다. 그는 전진의 여러 지역에서 병사들을 동원하였는데, 그 숫자가 무려 10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동진은 전진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보이자 먼저 선수를 쳤는데, 5월에 10만의 병력으로 양양과 촉을 공격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8월 부견은 자신의 동생 부융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25만의 병력을 주어 선봉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87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도 '장안'을 출발하였다. 동진에서도 본격적인 전진의 대군에 대항하여 '사석'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이를 막도록 하였는데, 전진의 군세가 세 갈래로 나뉘어 진격했기 때문에, 동진도 8만의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10월에 부융은 부하장수 '양성'에게 일군을 주어 동진의 군대를 견제하게 하고, 수춘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부견은 고무되어, 즉시 일단의 기병을 이끌고 급히 수춘으로 향했는데, 이 성급한 태도가 전쟁의 가장 큰 패인이 되었다.
비수 대전
수춘에 도착한 부견은 이 승리로 동진군의 기세가 꺽여 전쟁을 쉽게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동진군 사령관인 사석에게 사자로 '주서'를 보내 항복하도록 권했다. 이 주서는 본래 동진의 신하였는데, 이전에 양양 공방전에서 사로잡힌 몸으로 지금은 부견의 밑에서 신하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서는 몸은 전진에 있었지만, 마음은 동진의 신하였던 것 같은데, 사석과 만난 주서는 항복을 권하기는 커녕 부견은 수춘에 도착했지만, 전진의 본대는 아직 수춘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피하고 있던 사석에게 신속히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며 재촉하였다. 때마침 사석의 부하 '유뢰지'가 북부병을 이끌고 양성의 부대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는데, 이 '낙간 전투'에서 전진은 양성을 포함하여 10여명의 장수가 전사하였으며, 병사도 15,000명이나 전사하였다고 한다. 결국 부견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사석과 대치하였는데, 양 군은 비수를 사이에 두고 포진하였다. 그러나 양 군이 서로 강변에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지 못했고, 이에 사석은 부견에게 군을 조금 뒤로 물리어 공간을 만들어 주면 강을 건널테니 제대로 싸우자고 제안하였다. 전진의 군대는 아직 본대가 합류하지 않았지만 수가 더 많았기에, 부견은 일단 자리를 만들어주고, 동진군이 강을 건너면 바로 공격할 요량으로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전술에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부견이 군대가 제대로 통솔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러한 작전을 혼자만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또 전진의 군대는 동진의 군대에 비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였으나, 그 기세에서 이미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부견이 군대를 뒤로 물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전진군은 자신들이 숫자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밀리는 모양세가 되어 병사들이 더 동요하기 시작했고, 어느 틈엔가 이미 패배했다며 도망가라는 외침이 들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 강을 건넌 동진군이 틈을 놓치지 않고 돌격하면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전진군의 대열은 무너졌고, 사실상 동진군의 학살이 시작되어 완전히 궤멸되었다.
전진의 몰락
'비수 대전'은 고작 한번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전진에는 80만이 넘는 대군이 남아있을터였다. 그러나 전진은 전쟁에서 졌다. 부견은 상당한 능력주의자로 능력이 있다면 출신성분을 막론하고 중용하였다. 또 상당한 덕치를 행하였는데, 그는 정복한 나라의 왕이나 지배계층들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벼슬을 내리고 수도 인근에서 살면서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게하는 등 상당히 자비롭게 통치하였다. 그러나 사실 전진이 멸망하게 된 원인은 비수대전이 아니라, 바로 이 통치방식에 있었다. 전진에는 여러 이민족들이 섞여있었으며, 심지어 각 이민족들의 유력자들까지 살아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이들은 부견에 의해 정복당한지 얼마지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의 구성원으로 뭉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견이 전투에서 졌다는 소식을 듣자, 선봉대에 있던 강족 출신의 '요장'과 선비족 출신의 '모용수'는 그대로 군을 이끌고 말머리를 돌려 후퇴하였다. 부견의 뒤에서 따라오던 80만의 대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부견은 가까스로 장안까지 달아나는데 성공했지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전진은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