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서방 원정 「제2차 빈 공방전」
- 역사
- 2023. 7. 4.
헝가리를 둘러싼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쟁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가 언제인가 하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혹자는 '쉴레이만 1세' 시기를 최전성기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혹자는 쉴레이만 1세 때부터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혹자는 '메흐메트 4세' 시기에 오스만 제국의 최대 판도를 실현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최전성기로 보기도 하지만, 혹자는 '쾨프륄뤼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의 통치시기와 메흐메트 4세의 집권시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오스만 제국의 서쪽 끝으로 원정을 떠난 점에 있을 것이다. 쉴레이만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침공에 대한 헝가리의 '서포여이 야노시'의 구원 요청을 명분으로 출정하였고, 그대로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향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번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 아래에 있던 헝가리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퇴쾨이 임레'의 요청으로 다시 한번 오스만 제국은 빈을 향하여 진군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과 신성 동맹
1683년 '메르치폰루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의 대군이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향했다. 당시 동원된 오스만군의 규모는 약 15만에서 최대 3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반면에 빈의 수비대는 약 16,000명 정도로 알려져있는데, 숫자는 이전에 비해 오히려 줄어들었지만 장비가 현대화 되었기 때문에, 화력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도 장비가 현대화되기는 하였으나, 많은 수의 대군을 모두 최신 장비로 무장하기는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제1차 빈 공방전' 때에는 서유럽에 비해 오스만 제국의 장비가 더 현대화되어 있었다면, 이 시기에는 반대로 서유럽 군대의 장비가 훨씬 현대화 되어있었다. 또 이전의 공방전 때 빈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의 도시였다면, 이번에는 가문의 수장인 '레오폴트 1세' 본인이 통치하는 도시였다는 점도 차이가 있다. 레오폴트 1세 본인은 파사우로 몸을 피하기는 하였지만, 철저한 농성전을 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주변 국가들에게 이슬람의 침략으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결과적으로 빈은 오스만 제국의 대군에 의해 포위되었지만, '신성 동맹'의 기치 아래 모인 약 74,000명의 지원군이 빈을 구원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지난 공방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였는지, 빈을 완전히 포위하고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전략을 폈다. 이 전략은 확실한 효과를 나타내었고, 빈의 수비대가 선전하였을에도 불구하고, 몰려오는 공포와 배고픔은 착실하게 전력을 깎아나갔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신성 동맹의 구원군이 인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더 이상 장기전을 고집하기 어려워졌다. 오스만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했고, 그동안 쌓인 피로감에 더해 시작된 대대적인 공세로 인해 빈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되었다.
빈 전투와 대 튀르크 전쟁
그러나 하늘은 이번에도 오스만 제국의 편이 아니었다. 빈은 함락 직전이었고, 오스만의 대군이 몰려들었지만, 그 와중에 신성 동맹의 지원군이 도착하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지원군은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였고, 오스만군은 공성전이 한창이라 대응을 제대로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약 18,000명에 달하는 윙드 후사르의 기병 돌격을 받아 진형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한다. 이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기병 돌격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후 속속 신성 동맹의 지원군이 도착하였고,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은 배패하여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의 서유럽에 대한 야심은 빈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되었지만,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제1차 빈 공방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많은 수의 지원군이 빈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오스만 제국이 패퇴하기 시작하자 추격을 개시하였다. 이후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 될 때까지 16년에 걸쳐 '대 튀르크 전쟁'이 계속되었고, 그 사이 술탄이 3번이나 바뀌었으며, 전투의 승패에 따라 여러 재상들이 처형되거나 전사하거나 하였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이후에도 되찾지 못하였다.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스 차르국'에게 각각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영토를 빼앗겼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겨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