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수나라 황제 명제 「양광」
- 역사
- 2023. 7. 12.
고구려와의 악연
'양광'은 569년 '북주'의 '수국공' '양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서위'의 실력자였던 '독고신'의 딸 '독고가라'로, 그녀는 금욕적이었으나 질투심이 많은 성격으로 유명하며, 남편이자 황제인 양견에게 정치적 조언이나 간섭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양견도 그녀의 말을 쉬이 거스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581년 아버지 양견이 북주의 황제 '우문천'으로부터 재위를 선양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고, 12세의 양광은 황족이 되어 '진왕'으로 봉해졌다. 양견은 그 능력이 매우 뛰어났는데, 그는 중원을 통일하여 '위진남북조시대'를 종결시켰으며, '개황성세'라고 불리우는 태평성대를 열어 칭송받았다. 양광은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것 같은데,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589년 양견의 명으로 '남조'의 '진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공으로 '태위'의 벼슬을 받았으며, 후에 '양주총관'으로 동생인 '양량'을 도왔는데, 598년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한때 양견은 두 아들에게 자결하라고 명하기도 하였으나, 어머니인 '문헌황후' 독고씨의 중재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찬탈자 황태자
당시 수나라의 황태자는 본래 장남인 '양용'이었는데, 그는 문헌황후가 선정한 태자비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후궁을 총애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음의 병을 앓아 태자비가 사망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종과 사치를 즐겼고, 결국 문헌황후의 영향으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차남인 양광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양광은 본디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성격이었지만 야심많은 사람으로, 자신이 황태자가 되기 위해 어머니에게 잘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부모 앞에서는 안 그런척 연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또 이미 황태자로 책정되어있었던 양용을 몰아내기 위해 일부로 궁녀들을 보내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안 좋은 소문을 내기 위해 여러가지 음모를 꾸몄다고도 한다. 결국 양광은 자신의 계획대로 황태자에 책봉 될 수 있었는데, 그가 황태자로 책봉되는 날 지진이 일어나고 광풍이 부는 등 불길한 징조가 있었으며, 항간에서는 양광이 황제에 오르면 수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고 한다. 2년 후인 602년에는 문헌황후가 사망하였는데, 이때 양광은 남들 앞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하여 주변을 감동시켰지만, 자신의 처소에 돌아가서는 걸림돌이 되었던 어머니의 죽음을 기뻐하며 술과 고기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아내를 잃은 양견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는데, 604년 중병에 걸려 누워있었기 때문에, 후궁인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이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양광은 전부터 선화부인 진씨를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틈타 그녀를 습격하였고, 이후 그녀는 양견에게 도망쳐 이를 고했다고 한다. 혹은 중병에 걸린 양견을 보좌하고 있던 '월국공' '양소'가 앙견 사후에 양광이 즉위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는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실수로 서신이 양견에게 전해졌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대노한 양견은 양광을 벌하고 양용을 다시 태자로 삼으려고 했는데, 이 사실을 미리 알게된 양광이 병사들을 동원하고 황궁을 장악하였으며, 부하를 시켜 아버지 양견을 살해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형 양용까지 살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은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이해 쓰여진 것으로, 그 진의에 대해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또 양광이 아버지를 살해했다거나, 아버지의 후궁을 탐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히 기록된 내용은 없다.
수나라의 두번째 황제
604년 재위를 이어받은 양광은 수나라의 두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양견은 검소한 생활을 하며, 현명하게 통치하여, 당대에 수나라를 세우고 태평성대를 가져왔지만, 양광은 정반대로 사치를 일삼고, 나라를 몰락시키는 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등 대규모 건설사업에 착수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바로 대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이 운하는 남북으로 '황하'와 '장강'을 연결할 목적으로 양견의 통치시기에 시작되었던 것인데, 그 규모 때문에 국고의 손실과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중지하였던 것이다. 양광은 이 계획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를 더 크게 늘렸는데, 운하를 건설하면서 옆에 운하를 따라 대로를 놓았고, 길 양옆으로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게하였으며, 중간 중간 행궁을 40채나 짓게 하였다고 한다. 이 대규모 운하 건설 계획을 실행하는데 연간 1억 5,000만명이 동원되었으며, 건설 도중 부실한 곳이 발견되자, 그곳을 담당한 관리와 50,000명의 백성들을 인근에 생매장했다고 한다. 양광은 또 수도를 3개로 정하였는데, 본래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은 이미 있었기 때문에, '낙양'과 '양주'를 추가로 수도로 정했다. 장안은 서도, 낙양은 동도, 장강 이남의 양주는 강도라고 하였으며, 수도를 두개나 더 지어야했기 때문에 이는 엄청난 낭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낙양의 서쪽에 '서원'이라는 큰 정원을 지었는데, 둘레가 무려 200여리에 달했으며, 그 안에 넓은 호수를 파고, 다시 호수 안에 높이가 10장이나 되는 산을 3개나 쌓았다고 한다. 이 공사를 위해 매일 300만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동원되었는데, 그 중 과반수가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양광은 이 서원의 풍경을 봄으로 정했기 때문에, 가을에 낙엽이 지면 비단으로 나뭇잎을 만들어 장식하게 하였으며, 겨울에 호수가 얼면 얼음을 깨고 비단으로 만든 연꽃을 띄워두게 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양광은 국내를 유람하기도 했는데, 새로 만든 운하를 통해 낙양에서 양주까지 가기 위해, 수천 척의 배를 만들게 하였다. 양광을 비롯하여 황후와 후궁들, 그리고 고관대작들과 승려, 도사 같은 이들이 화려한 배를 타고 유람을 떠났는데, 사실 이 운하에서 배를 수월하게 움직이기 힘들었기 때문에, 배에 줄을 연결하여 지상에 있는 '전각'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끌고갔다. 이 전각들은 80,000여명에 달했으며, 거기다가 다시 황제를 호위하는 많은 기병들이 있었기 때문에 운하 인근의 대로도 사람으로 가득하였다. 배가 지나갈때마다 그 지역의 관리들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보물들과 산해진미를 가져다 바쳤기 때문에, 황제의 배가 지나갈때마다 실질적으로 이를 부담해야 했던 인근 지역의 백성들은 고통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양광은 유람을 할때마다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이동식 궁전인 '관풍행전'을 짓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되자 백성들은 노역이나 전쟁에 끌려가서 목숨을 잃는 것 보다 낫다고 하여, 팔이나 다리를 스스로 자르기도 했는데, 이렇게 팔이나 다리가 없는 것이 오히려 멀쩡한 것보다 복이라고 하여 '복수복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양광은 이러한 세태는 관심이 없어서, 동원할 남자들이 부족해지자, 여자들까지 끌고갔다고 한다. 하지만 완공된 대운하는 양광의 폭정과는 관계없이 나름대로 역할을 톡톡히하여, 수나라 이후로도 계속해서 요긴하게 쓰였으며, 이후 국가들은 오히려 대운하에 맞추어 수도를 옮기게 되기도 한다.
고구려 정벌
수나라는 중원을 통일하면서 명실상부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었고, '동돌궐'과 '토욕혼'을 정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주변의 많은 국가들이 수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당시에는 변방의 섬나라에 불과했던 일본에서도 '성덕태자'가 '견당사'를 파견했는데, 오직 고구려만 수나라에 복종하지 않았다. 양견의 집권시기에는 직접적으로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를 거부하기는 커녕,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수나라를 침공하여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수나라와 고구려가 백중지세였거나, 수나라가 패배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구려의 태도는 양광이 즉위하고나서도 계속되었는데, 612년 양광은 자신을 한번 패배시켰던 고구려에 대대적인 원정을 시작하였다. 이 원정에서 수나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군대를 편성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33만 3,800명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물자를 수송하거나 군대를 보조하기 위한 기타 인원들까지 합하면 300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엄청난 규모의 군대는 전부 출발하는데만 40일가량 걸렸으며, 이 행렬의 길이만 천여리(400Km)에 달했다고 한다. 양광은 '우문술'과 '우중문'을 좌・우장군으로 삼아 45만명씩 맡겼으며, 자신은 26만에 달하는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먼저 만주지역의 '국내성'을 목표로 하였지만, 이 시도는 '요동성'에서 좌절되게 된다. 이 원정은 첫단추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려고 했을때 준비했던 부교가 짧았기 때문에, 이에 당황한 군사들이 무질서해지면서 강건너에 있던 고구려군의 화살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워낙 대군이었기 때문에 양광은 이러한 피해를 크게 개의치 않은 것 같은데, 수나라군은 부교를 다시 만들어 요하를 건넜으며, 압도적인 숫자로 고구려군을 공격해 패퇴시키고, 100만의 군세로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도 수나라는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고구려의 요동성은 중국 국내에 있는 성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성벽은 매우 견고하여 수나라군의 공성병기로 파괴할 수 없었으며, 그 높이가 무려 30미터에 달했기 때문에 사다리가 짧아 성벽을 오를 수도 없었다. 수나라의 본대가 요동성에서 속수무책인 상태로 있을때, 이번에는 10만의 수군을 이끌고 있던 '내호아'가 단독으로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였다. 본래 수군은 본대가 평양성에 도착하면 협공하기로 되어있었지만, 본대가 발목잡혀 있는 동안 내호아가 공을 서둘러 일을 그르쳤고, 수나라 수군은 전투에 패해 반이상 궤멸되어 본국으로 후퇴하였다. 이쯤되면 포기할만도 하지만 양광은 멈추지 않았는데, 수군의 패배 소식을 들은 그는 이번에는 30만병의 별동대를 편성하고,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지휘를 맡겨 평양성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 별동대는 한때 평양성을 포위하기도 하였지만,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싸움을 지속할 수 없었고, 후퇴하는 도중에 살수 인근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하였는데, 이 '살수대첩'에서 30만 5,000명이 병사들 중 살아돌아간 병사가 2,700여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는 버티지 못할 만큼 심각한 타격이었고, 대노한 양광은 퇴각하면서 우문술과 우중문을 쇠사슬에 묶어 데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광은 고구려에 대한 정벌을 포기하지 못했는데, 그는 이듬해인 613년에 두번째 고구려 원정을 시작하였다. 양광은 확실히 군사적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는지 지난 원정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이번에는 35만으로 원정군의 규모를 축소하였다. 그리고 요동성 옆에 높은 토성을 쌓고, 그 위에서 성안으로 화살을 쏘았기 때문에 고구려군은 이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지만, 이번에는 수나라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수나라 '예부상서'였던 '양현감'이 양광이 없는 틈을 노려,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양현감의 친구였던 '곡사정'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고구려에 투항하였는데, 그의 직위는 '병부시랑'으로 군사부문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사실상 이번 원정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있는 위치였다. 양광은 빠르게 원정을 포기하고 물러났는데, 고구려군을 기만하기 위해 물자와 식량 등을 그대로 두고 퇴각하였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후 국내로 복귀하여 반란을 진압한 양광이었지만, 아직도 고구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고, 614년에 다시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너무 무리한 일이었고, 국내 곳곳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대소신료들이 이에 반대하였다. 양광은 반대하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며 원정을 강행하였지만, 이미 수나라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원정 도중에 끊임없이 탈영병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는데, 3년에 걸친 전쟁이 부담스러웠던 고구려는 항복했던 곡사정을 묶어서 보내면서 항복을 청하였다. 양광은 이러한 상황이 불만스러웠던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원정을 이 이상 강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짐짓 못이기는 척 항복을 받아들이고 돌아갔다고 한다.
수나라의 몰락
양광의 통치는 수나라 자체를 뒤흔들었다. 황제는 어마어마한 사치를 일삼는 동안 백성들은 노역과 전쟁으로 끌려가 죽는 이가 태반이었다. 617년 혼란스러운 수나라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무려 120여건에 달하는 반란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양광은 정사에 지쳤는지 반란을 진압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강도 양주로 피신하여 술과 여자에 빠져지냈다고 한다. 그래도 나름 생각은 있었는지, 서도 장안에는 손자 '양유'를 남겨 놓고, 동도 낙양에는 '양동'이 있었으며, 자신은 '양담'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어렸기 때문에 제대로 지킬 수 있을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연'과 '이세민'은 장안에 들어가 양유를 옹립하였으며, '왕세충'은 낙양을 장악하고 양동을 옹립하였다. 그리고 618년에 양광은 자신의 근위대 대장이었던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에 의해 살해당하였고, 이로서 수나라는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양광은 사망한 후에 시호가 수나라 '명제'가 되었는데, 당나라에서는 그의 폭정에 빗대어 비하의 의미로 '양제'라고 불렀다. 역사상 유명한 '수양제'가 바로 양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