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열두번째 군주 「무라트 3세」
- 역사
- 2023. 6. 16.
부전자전
'무라트 3세'는 1546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 '셀림 2세'와 하렘의 '누르바누 술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누르바누 술탄은 본래 '라셀'이라는 이름의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누르바누 술탄은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으로, 바다를 여행하다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술탄에게 바쳐졌다고도 한다. 무라트 3세는 셀림 2세가 '마니사' 총독으로 있을때 마니사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때부터 프랑스어와 아랍어 등을 교육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1558년에 셀림 2세와 동생 바예지드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 반목하자, 쉴레이만 1세가 두 사람의 영지를 변경하였는데, 이때 셀림 2세가 남쪽의 '카라만'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자, 무라트 3세는 콘스탄티니예로 보내져 쉴레이만 1세의 곁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후 1566년 셀림 2세가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면서 마니사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후계자로서 현직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1574년 셀림 2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니예로 가서 정식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되었는데, 이때 5명의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무라트 3세도 제국을 통치하는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아버지인 셀림 2세처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에서 지내면서 하렘에만 관심을 두었고, 사망하기 전까지 100명 이상의 자식을 보았으며, 그 중에 아들만 20여명 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무라트 3세가 정무를 소홀히 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사실상 통치한 것은 셀림 2세 때부터 대재상을 맡아온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였으며, 무라트 3세의 어머니 누르바누 술탄과 하렘의 애첩인 '사피예 술탄'이 정치에 간섭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쇠퇴의 조짐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오스만 제국은 셀림 2세와 무라트 3세 같은 막장 군주가 연이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저력이 남아있었다. 1576년 숙적 페르시아의 '샤한샤' '타흐마스프 1세'가 사망하자, 오스만 제국은 혼란에 휩싸인 페르시아로 침공을 시작하였다. 1578년에는 '캅카스' 지역 최대의 도시인 '티플리스'(현재의 트빌리시)를 점령하여 카스피해까지 도달하였다. 또 1585년에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옛 수도 였던 '타브리즈'를 점령하는 등 위세를 떨쳤고, 이는 1588년 페르시아에서 새로 샤한샤로 등극한 '아바스 1세'와 평화협정을 맺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589년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와 맺은 '페르하트 파샤 조약'에 따라,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을 포함하여, 자그로스 산맥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정식으로 확보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제국의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먼저 1579년 대재상으로 오스만 제국을 견실하게 이끌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암살당했다. 그는 사피예 술탄의 사주를 받은 예니체리에게 암살당했다고도 하고, 혹은 하사신파의 암살범에게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3명의 실권자 중 한명이 낙오하면서, 누르바누 술탄과 사피예 술탄이 고부간에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갈등하는 모양세가 되었다. 무라트 3세는 하렘에서도 사피예 술탄만을 유독 사랑했기 때문에, 누르바누 술탄은 사피예 술탄이 주술로 아들을 홀렸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오스만 제국은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여러 경제적 문제도 많이 발생했는데, 특히 1580년경부터 신대륙에서 다량의 은이 유입되면서 일어난 인플레이션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기축 통화였던 '악체 은화'의 질과 가치가 크게 하락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지탱하면 국가 시스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많은 관료들 사이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무라트 3세 본인도 총독 자리를 매매하는 등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 '티마르'를 지급받은 이들도 의무를 소홀히하면서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는데 치중하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장래가 보장된 '데브시르메'에 편승하려는 무슬림 세력과 많은 관료와 병역 자원이 필요했던 오스만 제국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데브시르메를 통한 무슬림 징집이 허용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데브시르메 징집 인재들의 질적 하락이 가속화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충돌
1592년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평화협정인 '에디르네 조약'이 만료되었는데, 이듬해인 1593년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어,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장 13년에 걸친 전쟁이 개막하였다. 이 '시사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은 패배하였지만, 이후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1594년에는 헝가리 북부의 '죄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티미쇼아라'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속국이었던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이반하는 등 오스만 제국의 전황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이때까지도 무라트 3세는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서신을 주고 받는 등 사이가 좋았으며, 이러한 관계에서 무역을 활발히 진행하는 등 양국간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또 무라트 3세는 개인적으로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서책을 출판하거나 궁정 화가들을 후원하였으며,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1595년 무라트 3세는 오스만 제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하였고, 아들인 '메흐메트 3세'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