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카가 백만석의 「마에다 토시이에」
- 역사
- 2023. 6. 19.
창의 마타자에몬
'마에다 토시이에'는 1538년경 '오와리'의 지방 토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1년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들어가 모시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인 1552년에 오다 가문의 내전격인 가야즈 전투(萱津の戦い)에 처음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1556년에 벌어진 '이노우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하였으며, 노부나가가 오다 가문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창설한 일종의 친위대격인 '아카호로슈'의 일원이 되어 출세를 시작하였다. 1558년에는 '호슌인'(마츠)와 결혼하였고, 이 즈음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친분을 가졌으며, 서로의 부인끼리도 사이가 좋아서 부부동반으로 교류를 하였던 것 같다. 이듬해인 1559년 같은 아카호로슈의 일원인 '주아미'와의 갈등으로 그를 살해하여, 노부나가 휘하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본래도 토시이에는 기껏해야 십부장 정도의 위치로 상당히 가난한 생활을 한 것 같은데, 이때 완전히 무직인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한 것 같다. 그러나 토시이에는 끝까지 노부나가를 따라갈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는 다른 가문에서 자리를 찾기는 커녕, 멋대로 오다 가문의 군에 합류하여 전투에 참전하여,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와 1561년 '모리베 전투'(森部の戦い)에서도 활약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토시이에의 노력은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토시이에는 3년만에 다시 노부나가의 휘하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궁핍한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토시이에는 이후로도 돈을 쓰는 것에 상당히 인색하게 굴었고, 토시이에의 가신들은 적은 봉록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또 이 시기 토시이에는 상당히 혈기왕성했던 것 같은데, 눈에 띌 수 있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서는 용맹하게 적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그가 장창을 즐겨쓰는 것을 보고 '창의 마타자에몬'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1569년에는 노부나가의 명으로 형인 '마에다 토시히사' 대신 마에다 가문의 당주로 임명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병약한 토시히사가 전투에 참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토시이에가 당주가 되기 위해 노부나가에게 간청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토시히사와 불화가 컸던 것 같지는 않다. 토시이에는 계속해서 노부나가를 모시면서 출세하였고, 1570년에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하였고, 1574년에는 '나가시마의 잇코잇키' 진압에 참가하였다. 1574년에는 오다가의 가신인 '시바타 카츠이에' 휘하에서 활동하였는데, 필요할때는 노부나가 휘하로 합류하여 1575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1581년 '노토국'의 '나나오성' 성주가 되었으며, 노토 지역의 23만석을 소유한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와 함께 잡은 천하
1582년 토시이에는 카츠이에 휘하에서 '엣추국'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였다. 이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기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와 카츠이에가 대립하면서, 토시이에는 계속해서 카츠이에의 휘하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토시이에는 친한 친구인 히데요시와 대립하는 것에 상당히 부담을 느낀 것 같은데, 카츠이에와 히데요시 사이에서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이듬해 '시즈가타케 전투'가 벌어졌고, 토시이에는 카츠이에의 휘하에서 출전하였지만, 수동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다가 퇴각한 것 같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퇴각이 결정적으로 히데요시의 승리로 이어졌다고도 하고, 혹은 이미 패배를 직감한 카츠이에가 퇴각시켰다고 하기도 한다. 이 사건이 진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전투 이후에 배패한 카츠이에는 자신의 휘하에서 출전한 토시이에에게 감사를 표했다고도 하며, 히데요시도 토시이에와의 우정에 문제가 생기진 않은 것 같다. 이후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였고, 본래의 영지에 더해 '카가국'의 일부와 '오야마성'(카나자와성)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 휘하에서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데 계속 기여하였고, 히데요시의 '오대로' 중 한명으로 서열 2위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당시 이러한 토시이에의 존재감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함부로 간과할 수 없었고, 토시이에가 사망할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못 했다고 한다. 토시이에는 1598년 가문을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였고, 1599년 오사카의 자택에서 지내다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카가번의 마에다 가문
토시이에 사후 혼란한 정국이 시작되자, 마에다 가문이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최선봉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카가 정벌을 준비하자, 토시나가는 히데요시 가문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토시나가는 어머니인 호슌인을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전쟁을 피하고 이에야스 휘하로 합류하였는데, 이 결정에는 호슌인 본인이 선견을 발휘하여 개입했다고 하기도 한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 휘하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 공으로 카가국과 노토국, 엣추국의 120만석에 달하는 거대한 영지를 가지게되었고, 이는 이후 '카가번'(카나자와번)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러한 지위는 막부 말기까지 계속되었고, 메이지 유신 등 일본의 개혁이후 마에다 가문은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