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노부나가의 교육담당 「히라테 마사히데」
- 역사
- 2023. 6. 13.
노부히데의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는 1492년경 태어났는데, '오다 노부사다'의 신하였던 아버지를 따라, 노부사다의 아들인 '오다 노부히데'를 섬겼으며, 노부히데의 중신으로 주로 외교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마사히데는 다도나 와카 등에도 능했는데, 1533년에 '오와리국'을 방문한 공가의 '야마시나 토키츠구'로부터 칭찬받을 정도 였다고 한다. 1543년에는 노부히데의 대리인으로 교토로 헌상품을 보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때 조정과의 외교 활동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1534년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나자, 노부히데에 의해 후견이 중 한명이 되었으며, 노부나가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1547년에 노부나가의 첫 전투때에도 후견인으로 참전하여 보좌하였다. 또 1548년에는 노부히데와 '미노국'의 '사이토 도산'과의 평화협상을 진행하였는데, 이때 도산의 딸인 '노히메'와 노부나가의 결혼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의문의 할복
마사히데는 단순히 가신으로서 노부나가를 섬긴 것 뿐만 아니라, 교육담당으로서 노부나가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은데, 노부나가는 마사히데를 친근하게 '할배'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당시 노부나가의 기행은 많이 알려져 있어, 공공연하게 '멍청이'라고 불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담당으로서는 이만저만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1552년 노부히데가 사망하였는데, 노부나가는 건달같은 차림새로 장례를 치루는 자리에 들어와서, 향을 한줌 집어 위폐에 뿌려버렸다고 한다. 이후 들어온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유키'는 복장을 단정히 하고 예의를 지켰기 때문에, 이전의 노부나가의 행동과 크게 대비되었고, 가문 내부에서 노부나가가 가문을 잇는 것에 대한 불만 터져나왔고, 노부유키를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553년 돌연 마사히데는 할복하여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63세로 고령이기는 하였으나, 딱히 그가 할복해야할 필요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는 유서를 남기거나, 따로 의지표명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할복 했는지에 대해서는 베일에 쌓여있다. 일설에 의하면 노부히데로부터 노부나가의 교육담당으로 맡겨졌는데, 노부히데의 장례 당시의 노부나가의 행동을 보고 자신이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죄의 뜻으로 할복했다고 하기도 하고, 자신의 할복을 통해 노부나가에게 충격을 주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려고 했다고 하기도 한다. 또는 당시 마사히데의 아들과 노부나가 사이에 사소한 트러블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할복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의도로 할복했는지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할복이 노부나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마사히데의 죽음에 영향을 받기는 한 것 같은데, 노부나가는 죽은 마사히데를 기리기 위해 '세이슈지'(政秀寺)를 지었다고 한다. 또 마사히데의 세 아들들도 중용했는데, 안타깝게도 세명 모두 전투 중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