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열일곱번째 군주 「무라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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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어린 꼭두각시 술탄

'무라트 4세'는 1612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니예에서 술탄인 '아흐메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622년 형이자 술탄이었던 '오스만 2세'가 '예니체리'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삼촌 '무스타파 1세'가 다시 술탄으로 복위하였는데, 무스타파 1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623년 다시 강제로 퇴위 당하였다. 이에 무라트 4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였는데, 당시 무라트 4세는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인 '마흐페이케르 쾨셈 술탄'이 실권을 잡고 권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이 혼란을 틈타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가 침공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빼았겼고, 아나톨리아 북부지역에서는 연이어 폭동이 일어났다. 1631년에는 예니체리들이 다시 폭동을 일으켰는데, 궁전까지 쳐들어와서 대재상과 관료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1632년까지 약 9년 동안 쾨셈 술탄은 대재상을 8번이나 교체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지만, 이러한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1632년 20세가 된 무라트 4세는 직접 통치를 선언하였다. 이로서 쾨셈 술탄은 공식적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관료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지켜보는 등 야심을 계속 드러내었다. 

술탄의 통치

통치를 시작한 무라트 4세는 혼란스러운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법 체계를 정비하였는데, 역대 술탄들이 통치에 관심을 두지 않은 동안 정치에 개입하여 실권을 쥐고 흔든 여러 애첩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어지럽혀진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무라트 4세는 법을 어기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하였기 때문에, 공포 정치를 통해 통치를 행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그는 커피와 담배, 그리고 음주를 금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먼저 그는 담배를 금지하고 피우는 자들을 처벌하였는데, 이를 위해 변장한 부하들을 수도인 콘스탄티니예와 제국 각지의 도시에 보내 단속하게 하였다고 한다. 담배를 피우다가 걸리면, 처음에는 막대한 벌금과 함께 경고를 받는 것으로 끝났지만, 두번째부터는 예외없이 처형하였기 때문에,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약 3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다가 처형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담배를 피우다가 몇번이나 걸린 자를 괴씸죄를 더하여 무라트 4세가 직접 자신의 철퇴로 머리를 때려 죽였다고도 한다. 이 처벌에는 진짜로 예외가 없었는데 콘스탄티니예의 프랑스 대사관에서는 술탄의 명령을 무시하고 대사관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이에 무라트 4세는 경고를 무시한 대사관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으며, 담배를 피우던 대사관 직원의 귀를 자른 후에 프랑스로 추방해 버렸다.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루이 13세'가 이러한 폭거에 항의하였는데, 무라트 4세는 이에 대해 사형 대신 귀를 자르고 추방하는 것으로 형을 감하여 프랑스를 배려해 준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또 무라트 4세는 자신의 부하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때때로 거지처럼 분장하고, 직접 거리에 나가 시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무라트 4세가 담배를 금지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일단 무라트 4세가 개인적으로 담배를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1633년에 콘스탄티니예에서 대화재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이 화재가 담뱃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도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담배로 위장한 마약이 유행했기 때문에, 이를 단속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완전히 근절시키지는 못했고, 많은 이들 담배를 계속해서 피웠고, 대신 단속을 피하기 위해 담배 냄세를 지우기 위한 방법으로 향수를 뿌리거나 레몬즙을 사용하였고, 튀르키예의 국민 향수로도 불리는 '콜로냐'(Kolonya)가 여기서 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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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음주 금지

무라트 4세는 커피도 금지시켰는데, 정확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커피를 마시는 '카흐베하네'(Cafe)를 금지시켰다. 무라트 4세가 커피를 금지시킨 것도 담배처럼 커피를 싫어해서 라고 하는데, 이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도 생각된다. 커피를 마셨다는 이유로 10만명 이상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은 커피 원두를 독점하여 유럽에 판매하면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의 카흐베하네는 주로 예니체리들이 운영하고 이용하였는데, 여기서는 이후 유럽의 카페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많은 사회 현상이나 문제, 사상 등에 대한 토론이 오갔고, 이 때문에 반란의 온상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무라트 4세는 예니체리에 대해 안좋은 감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형인 오스만 2세가 예니체리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자신이 술탄에 즉위하고 나서도 예니체리들이 폭동을 일으켜 거리낌없이 궁전에서 관료들을 살해하는 등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러한 기호품의 금지 정책으로 인해 무라트 4세는 상당히 인기없는 술탄이었을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게다가 음주를 금지한 것은 더 문제가 되었는데, 무라트 4세가 본래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음주를 금지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술을 즐겨마셨다. 하물며 술이 아주 나쁜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해 본인이 다 마셔버리겠다는 시를 쓰는 등, 이러한 무라트 4세의 행위는 시민이나 관료 할 것 없이 비호감이었을 것은 명확한 것 같다.

오스만 제국의 해결사

그러나 무라트 4세는 군사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면한 오스만 제국의 위기를 직접 모두 해결해 버렸다. 1633년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문에 폴란드는 러시아와 휴전하고 병력을 이끌고 남부로 이동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였다. 이에 무라트 4세는 발 빠르게 폴란드의 왕 '브와디스와프 4세'와 접촉하여 평화 협정을 맺었고, 문제를 일으킨 총독을 콘스탄티니예로 소환하여 처벌하였다. 163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페르시에 반격을 시작하여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였으며, 타브리즈와 하마단을 정복하고, 1638년에는 바그다드를 되찾아왔다. 또 이와중에 아나톨리아 북부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모두 진압하기까지 한다. 1639년에는 페르시아와 '주하브 조약'(Zuhab)을 맺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시 오스만 제국의 영역으로 만들고 귀환하였다.

다시 꼭두각시 술탄

무라트 4세는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많은 기념물들을 건축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 인도의 '무굴 제국'과도 교류하였는데, 무굴 제국의 '샤 자한'의 요청으로 건축가를 보내주었고, 후에 그 건축가가 '타지마할'을 건설하는데 관여하였다고 한다. 또 시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수수께끼를 내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무라트 4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끝내고 돌아온 1640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원인에 대해 유럽에서는 간경화로 인해서라고 하고, 오스만 제국에서는 통풍으로 죽었다고 한다. 제국의 문제를 해결한 그는 자신의 문제로 명을 달리한 것이다. 무라트 4세의 자식들은 모두 일찍 죽어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후 다음 술탄으로 동생인 '이브라힘'이 즉위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미 다른 동생들을 다 처형했던 무라트 4세가 사망 전에 이브라힘도 처형하도록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럴 경우 술탄의 혈통이 끊어지기 때문에 쾨셈 술탄이 보호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교로운 상황을 생각해보면 무라트 4세의 죽음에 쾨셈 술탄이 관여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브라힘도 삼촌인 무스타파 1세처럼 오랜 카페스 생활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했고, 때문에 쾨셈 술탄이 다시 권력을 잡고 실권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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