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열여덟번째 군주 「이브라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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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새장에 갇힌 후계자

'이브라힘'은 161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흐메트 1세'와 '마흐페이케르 쾨셈 술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술탄의 유력한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렘이 구석에 있는 '카페스'에서 오랜 기간동안 갇혀지내게 된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새로운 술탄이 즉위하게 되면 형제들을 살해하도록하는 법이 있었다. 이는 후계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가 술탄이 될 수 있도록 경쟁을 부추기면서, 동시에 탈락한 후계자들에 의한 후환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사실상 '쉴레이만 1세' 이후로 제대로 지켜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브라힘의 아버지인 아흐메트 1세도 13세의 어린나이에 술탄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당장 형제들을 제거하였다가 후에 술탄이 후사를 보지 못하게 되면, 술탄의 혈통이 끊기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유력한 후계자를 제외한 나머지 후계자들은 하렘의 구석에 마련된 카페스에 사실상 감금 되었는데, 이로서 술탄의 혈통은 더 지켜지기 쉬워졌으나, 대신 오랜 감금생활로 인해 여러 부작용들이 발생하였다. 1617년 아흐메트 1세가 사망한 이후에 술탄으로 즉위한 그의 동생 '무스타파 1세'의 경우도, 오랜 카페스 생활로 인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이 때문에 이듬해인 1618년에 강제로 퇴위되었다. 이후 이브라힘의 배다른 형인 '오스만 2세'가 술탄으로 즉위하였지만, 그는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다가 이에 반발한 예니체리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하였다. 결국 한때 다시 무스타파 1세가 술탄으로 복위하였지만 이내 폐위되었고, 1623년 이브라힘의 친형인 '무라트 4세가' 다시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죽음과 함께하는 카페스 생활

무라트 4세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술탄으로 즉위하였는데, 이 때문에 어머니인 쾨셈 술탄이 섭정으로서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하였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제국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1632년 20세가 된 무라트 4세는 자신이 오스만 제국을 직접 통치할 것을 선언하였다. 무라트 4세는 제국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숙적인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영토를 되찾아오는 등 오스만 제국의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갔지만, 동시에 자신의 형제들인 카페스의 후계자들을 하나씩 처형하였다. 결국 카페스에는 이브라힘만이 남았는데, 이 때문에 항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이브라힘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신경질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항상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1640년 무라트 4세는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유언으로 이브라힘을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브라힘 마져 죽게될 경우 술탄의 혈통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에, 여러 관료들과 쾨셈 술탄의 의도로 이 명령은 무시되었고, 이브라힘은 카페스에서 나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당시 이브라힘은 관료들이 찾아와서 자신보고 술탄에 즉위하라고 하자, 자신을 시험해 보려는 무라트 4세의 음모로 생각하고 극구 거절하였다고 한다. 결국 쾨셈 술탄은 무라트 4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브라힘에게 보여주었고, 시체를 확인하는 이브라힘에게 술탄에 즉위하지 않으면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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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가의 부활과 폐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된 이브라힘에게 쾨셈 술탄은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는데, 바로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술탄의 혈통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쾨셈 술탄은 많은 여자들을 데려다가 하렘을 체웠으며, 의학부터 주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브라힘을 지원하였고, 결과적으로 이는 큰 성과를 내서 혹자들은 이를 가리켜 이브라힘을 제2의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브라힘의 정신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는데, 이브라힘은 첫째 아들인 '메흐메트 4세'가 태어났을때, 그의 유모의 아들은 이뻐하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인 메흐메트 4세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메흐메트 4세의 어머니인 '투르한 하티제 술탄'이 화를 내자, 이브라힘은 역으로 화를 내면서 간난아이인 메흐메트 4세를 연못에 집어 던졌다고 한다. 연못에 빠진 메흐메트 4세는 얼른 하인들이 건져내어 무사하였지만, 일설에 의하면 이때 이마에 흉터가 생겼다고도 하고, 혹은 이후 메흐메트 4세가 한 농담이 마음에 안든 이브라힘이 집어던진 칼에 맞아 생겼다고도 한다. 또 이브라힘은 자신의 애첩들에게 금은보화나 토지를 선물하기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제국의 재정에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세금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이브라힘은 가장 총애하던 '텔리 휘마샤 술탄'과 결혼하였는데, 이때 방 하나를 흑담비의 모피와 이집트의 보석으로 가득체워서 주었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의심병 때문에 한번은 한 하렘의 애첩이 다른 애첩이 남자와 만난다고 고자질하자, 하렘에 있던 280명의 애첩을 모두 자루에 담아 바다에 던져버렸다고도 한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술탄이었지만, 즉위 초기에는 무라트 4세 때부터 있었던 유능한 대재상인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보좌를 받으며, 나름 안정적으로 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쾨셈 술탄과 관료들의 음모로 그가 처형당한 이후로는, 쾨셈 술탄과 이브라힘에게 아부하는 간신들만이 남았다. 관료들은 부패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제국은 세가 기울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칸디아 전쟁'(크레타 전쟁)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이 봉쇄되면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결국 1647년에 관료들을 중심으로 쾨셈 술탄의 허락을 받아 이브라힘을 폐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는 사전에 누설되어 많은 관료들이 처형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어머니인 쾨셈 술탄도 궁전 밖으로 쫒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이듬해인 1648년 예니체리들과 관료들, 그리고 일부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쾨셈 술탄의 허락을 받고 이브라힘을 강제로 폐위시켰다. 이브라힘은 폐위되어 감금되어 있었으나, 곧 살해당했고, 다음 술탄으로 아들인 6세의 메흐메트 4세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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