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을 흔든 여성, 첫 황후 「휘렘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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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의 슬라브인

'휘렘 술탄'의 본명은 '알렉산드라 아나스타시아 리소프스카'로 본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도시인 로하틴, 또는 르비우 출신이라고 한다. 그녀는 정교회 사제의 딸로 오스만 제국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는데, 10대 시절에 이 지역을 침공한 크림반도의 '타타르족'에게 생포되어 '크림 칸국'의 궁전으로 보내졌고, 이후 크림 칸국에서 오스만 제국에 공물로서 보내졌다고 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하렘은 '셀림 1세'의 애첩인 '하프사 술탄'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하프사 술탄은 그녀를 아들인 '쉴레이만 1세'에게 주었고, 그녀에게 반한 쉴레이만 1세가 휘렘(즐거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휘렘 술탄을 보통 '록셀라나'(Roxelana)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흔한 시골 처녀에서 일약 황제의 애첩이 된 것인데, 이것을 행운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불행으로 생각해야 할지는 당사자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첫 황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대신 하렘에 거주하는 애첩들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알라의 대리인인 '파디샤'가 인간과 결혼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이유였지만, 덕분에 황후를 비롯한 외척 세력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 기본적으로 하렘의 애첩들은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에, 술탄의 애첩으로서 적당한 대우를 받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노예로서 술탄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또 이슬람 사회에서 무슬림은 노예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럽 여러지역이 기독교인이 다수를 이루었고, 외척이라고 할만한 세력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쉴레이만 1세는 이러한 전통을 깨는 결정을 하였는데, 그는 휘렘 술탄을 자신의 부인으로 공표하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에 오스만 제국에는 황후를 뜻하는 단어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휘렘 술탄은 따로 '하세키 술탄'이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술탄에게만 속한 자'라는 뜻으로 말하자면 '수석 애첩'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여튼 서유럽에서는 자신들의 작법에 따라 황후로 생각하였다. 쉴레이만 1세는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힙비'(Muhibbi)라는 필명으로 시를 지었는데, 이는 '사랑에 미친 남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사랑에 미친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깨고, 오스만 제국의 역사의 뒷편에만 존재했던 하렘의 여성을 전면으로 불러내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미래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휘렘 술탄의 정치개입

휘렘 술탄은 일반적인 다른 하렘의 애첩들과 다르게 어렸을적부터 교육을 받아 총명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쉴레이만 1세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하였고, 쉴레이만 1세가 그녀의 이러한 점을 마음에 들어하여 황후로 했다고 한다. 황후가 된 휘렘 술탄은 이후 더 직접적으로 조언자 역할을 한 것 같은데, 그녀는 오스만 제국의 외교 정책이나 국제 정세 등에 대한 부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녀가 당시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2세'에게 보낸 편지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고 한다. 이러한 그녀의 행위가 오스만 제국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이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후계자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휘렘 술탄은 자신의 아들을 다음 술탄으로 만들기 위하여 여러 음모를 꾸며서, 쉴레이만 1세와 친분이 두터웠던 대재상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를 숙청하고, 당시 총명하다고 평가받았던 유력한 후계자였던 '무스타파'를 처형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폐단은 휘렘 술탄에게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이어지게 되어,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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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림 2세의 즉위

쉴레이만 1세와 휘렘 술탄의 사랑은 그녀가 죽을때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쉴레이만 1세는 해외로 원정을 떠날때도 계속해서 휘렘 술탄과 편지를 주고 받았고, 그때 오간 편지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1558년 휘렘 술탄이 먼저 사망하여, 콘스탄티니예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에 묻혔다. 그녀는 직접보지는 못 하였지만, 후에 그녀가 원한대로 아들인 '셀림 2세'가 다음 술탄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정치적 목적도 나름대로 이룬 셈이다. 극단적으로 남성위주의 사회였던 중세의 이슬람 국가에서 휘렘 술탄은 노예의 신분에서 황후가 되어, 국가의 정치에 개입하여 좌지우지 하였다는 점 때문에, 소위 페미니즘적인 부분에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녀가 정치에 개입하자마자 우려되었던 여러 문제들이 시작되었고, 그녀의 정치 개입으로 인해, 후대에 계속해서 술탄의 애첩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행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좋게만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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