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크족의 오스만 '오스만 1세'는 1258년경 아나톨리아 반도의 비티니아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할아버지인 '쉴레이만 샤'는 본래 중앙아시아 지역의 흔히 '돌궐'이라고 부르는 튀르크계 부족의 족장으로, 당시 위세를 떨쳤던 '칭기츠 칸'의 몽골족의 압박으로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이들은 이 지역의 튀르크계 국가였던 '룸 술탄국'의 용병으로 활동한 것 같은데, 이후 오스만 1세의 아버지인 '에르투룰' 때부터 완전히 정착하여 룸 술탄국의 신하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스만 1세가 태어날 무렵부터 이미 룸 술탄국도 몽골의 강력한 영향력에 쇠퇴해가고 있었으며, 지방의 영주들이 독립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에르투룰도 세력 기반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한 것 같은데, 중..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1737년 런던 남부의 푸트니에서 태어났다. 그는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와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가 한때 남해회사 사건에 연루되어 상당량의 재산을 몰수당하였지만, 이후에 복권되면서 다시 재산을 되찾았다고 한다. 기번은 6명이 형제가 있었지만 모두 영유아 시기에 사망하였는데, 기번도 어렸을때부터 병약하였기 때문에, 그는 간호사들에게 둘러쌓여 있었고 모친에게 냉 대당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어머니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후 고모인 캐서린 포튼의 하숙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적능력이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은데, 1752년 15세 때 옥스포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서 공부하는 동안, 기번의 높은 지적 수준 때문에 교수들..
로마 시대의 엘리트 출세 코스 현대의 엘리트 코스라고 하면 보통 법대나 의대를 졸업하여 현직에서 출세 코스를 달리다가, 더 나아가 정계에 진출하여 장관이나 의원이 되는 것일 것이다. 고대 로마에도 이러한 엘리트 출세 코스로 인식되는 것이 있었는데, 로마인들은 이를 '쿠르수스 호노룸'이라고 불렀다.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면서 다른 나라들과 다른 특이한 통치체제를 구축하였는데, 기본적으로는 귀족들을 중심으로한 원로원이 주도하였지만, 그 안에서 집정관이나 호민관 등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공직자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로마인들은 귀족들부터 평민들까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나 명예를 중시하던 로마인들은 사회에 공헌하는 것을 큰 공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연스..
로마 제국 오현제 시대의 정치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란퀼리우스'는 69년 로마 제국 북아프리카 속주의 '히포 레기우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인 '수에토니우스 라에투스'는 '에퀴테스' 계급으로 '네로' 황제 사후에 있었던 로마 제국의 내전기 때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휘하 있었으며,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와의 전투에도 참전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어린 시절을 북아프리카의 고향에서 보내다가, 성년이 된 이후 로마에 건너가서 생활한 것으로 보이는데, 로마에서는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이때 원로원 의원지자 역사가였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小 플리니우스)와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플리니우스는 수에토니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는데, 수에토니우스는 이를 통해..
로마 원로원 고대 로마를 가리키는 단어로 흔히 SPQR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알려져있다. 이처럼 '원로원'(Senatus)이란 로마를 대표하는 정치기구로 로마 구성원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로마의 입법・사법・외교・행정 전반에 걸친 의사결정을 하는 기관이다. 이러한 로마 원로원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로마 원로원은 고대 로마 왕정 시절에는 주로 왕의 통치 행휘에 대한 조언자의 역할을 했는데, 당시에는 주로 로마의 오래된 귀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귀족 연합체에 가까웠다. 로마는 그 시작과 동시부터 주변 민족과의 융화가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방식의 흡수 확장 정책으로..
동로마 제국 군단 사령관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는 505년 '일리리아'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젊은 시절부터 동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반 병사부터 시작하여 10년여만에 부대장의 지위에 까지 올랐는데, 이를 눈여겨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 황제의 경호원으로 발탁되었고, 이때 후계자인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와도 면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25년경부터 '이베리아'(현재의 조지아 동부) 지역에서 종교 문제로 인해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이 갈등이 점점 커져 양국간의 전쟁으로 번지자 527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동방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듬해 페르시아는 이베리아를 넘어 '라지카'까지 쳐들어 오..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역사학자 '크리스티안 마티아스 테오도어 몸젠'(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은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법학자로 '슐레스비히 공국'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로 당시에는 몸젠이 태어난 1817년에는 덴마크 왕국의 영지였으나, 이후 이 지역은 1・2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거쳐 독일 제국에 편입되게 되었다. 몸젠은 원래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바탕으로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홀슈타인에 있는 킬 대학교에서는 법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전공으로 로마법을 연구하면서 로마에 관심을 갖기시작한 것 같으며, 이후 덴마크 왕실의 장학금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여행하면서 로마 시대의 문서들을 연구할..
고대 로마 시대 최고의 형벌 고대 로마의 법은 449년에 제정된 '12표법'을 시작으로 하여, 로마가 발전해 감에 따라 세분화·다양화 되었고, 로마의 영향권이 확장되면서 거의 전유럽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로마법은 438년에 완성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나 530년경에 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로마법 대전)을 통해 정리되었고, 이후 유럽의 국가들의 법에 영향을 주어, 그 영향은 현대의 법에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법 체계를 가지고 있던 로마에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는 형벌이 있었는데, 이것은 '기록말살형'이라는 것으로 당시 로마에서는 사형보다 더 중한 형벌로 취급되었다. 기록말살형은 말 그대로 해당 죄인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는 것이었는데, ..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황제의 아들로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는 482년경 '다르다니아 타우레시움'에서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집안은 하층민으로 보잘것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오빠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직업 군인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큰 공을 세운 적은 없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군대에서 상당히 활약한 것 같고, 근위대의 지휘관으로 승진하였으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승승장구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혈연인 여동생의 아들 유스티니아누스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여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양자로 삼아 사실상 가문의 후계자로 정하였다. 518년 '플라비우스 아나..
농부 출신의 군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는 450년 '일리리쿰' 지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인이 된 지역 속주민으로 가난한 하층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릴적부터 농업에 종사하다가, 10대 시절에 이민족의 침공을 피해 콘스탄티노플로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이때 유스티누스는 한푼도 가진게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의 경비대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이 선택으로 그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는데, 유스티누스는 군생활에 상당히 잘 적응한 것 같은데, 아예 고향에 남아있던 아내 '에우페미아'까지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이고, 본격적으로 전문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유스티아는 동로마 군단의 병사로 '페르시아'와 '이사우리아족'과의 분쟁에서 활약하여 지휘관으로 승진..
전통 귀족 가문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는 430년경 '디라키움'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있었고, 이탈리아의 오래된 로마 귀족인 '풀비우스 가문'의 피도 이어받았으며, '세베루스 왕조'와도 연관된 가문의 후예였다고 한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청년 시절에 속주에서 재무관을 지내면서 공직 경험을 쌓았다. 491년 '플라비우스 제노' 황제가 사망하였는데, 그의 후계자 후보로 동생인 '플라비우스 롱기누스'가 주목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제노와 롱기누스는 비록 로마인이기는 했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소수민족인 '아사우리아족' 출신이었고, '플라비우스 레오'(레오 1세) 때부터 동로마에서 중용되어 권력을 잡은 신흥세력에 속하였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아나톨리아 출신 황제 '플라비우스 제노'는 425년경 태어났는데, 그는 로마인이었지만 정확히는 아나톨리아 지역의 타우루스 산맥에 사는 산악민족인 '이사우리아족' 출신이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레오 1세) 황제가 당시 동로마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게르만계의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아스파르'를 견제하기 위해 이사우리아 출신들을 대거 발탁하면서, 족장이었던 제노는 트라키아 지역의 동로마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노의 원래 이름은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데오테스'였으나, 이때 레오 1세의 딸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와 결혼하면서 그리스식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473년 레오 1세는 72세의 고령의 나이였는데, 그는 후계자로 제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플라비우스 레오'(레오 2세)를 지명하고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