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동로마 제국 일곱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
- 역사
- 2023. 5. 18.
전통 귀족 가문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는 430년경 '디라키움'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있었고, 이탈리아의 오래된 로마 귀족인 '풀비우스 가문'의 피도 이어받았으며, '세베루스 왕조'와도 연관된 가문의 후예였다고 한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청년 시절에 속주에서 재무관을 지내면서 공직 경험을 쌓았다. 491년 '플라비우스 제노' 황제가 사망하였는데, 그의 후계자 후보로 동생인 '플라비우스 롱기누스'가 주목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제노와 롱기누스는 비록 로마인이기는 했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소수민족인 '아사우리아족' 출신이었고, '플라비우스 레오'(레오 1세) 때부터 동로마에서 중용되어 권력을 잡은 신흥세력에 속하였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오랜 기간 게르만족이나 아사우리아족 같은 소위 야만족들이 개입하여 동로마 제국이 권력을 쥐고 흔드는 것에 지쳤기 때문에, 전통적인 로마인 황제를 새로운 황제로 원하였다. 이에 제노의 황후인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와 원로원이 협의하여 아나스타시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때 아나스타시우스는 60대였는데, 공정하고 성실한 인품으로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나스타시우스에게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는 이단으로 규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믿는 신자였다. 당시 콘스탄노플의 총대주교 '유페미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단성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였고, 이 요구를 받아들인 아나스타시우스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위협
492년 롱기누스는 자신이 황제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아사우리아족의 근거지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아나스타시우스의 진압 명령을 받은 '스키타이족' 출신의 지휘관들에 의해 빠르게 격파되었지만, 롱기누스는 산간 요새에 틀어박혀 계속버텼고, 이 반란은 498년에 롱기누스가 사로잡힐때까지 계속되었다. 499년경에 '페르시아'에 기근이 들었는데, 페르시아의 '카바드 1세'는 동로마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나스타시우스는 이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가 안 좋아졌다. 결국 502년 페르시아는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였고 일부 도시들을 점령하였는데, 양국이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 '훈족'이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다. 이에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는 평화협상을 진행하기로 하였는데, 협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어 506년에 가서야 7년간의 휴전에 합의 할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 협상에서 상당한 배상금을 지급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전에 정기적으로 페르시아에 보내던 상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화폐 개혁과 국방 강화
아나스타시우스는 납세의 기준을 현물에서 화폐로 바꾸어 통일하도록 하였으며, 기존의 화폐를 교체하기도 하였다. 또 부정부패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시행하여 부정한 관료들을 배제하였는데, 이로인해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세수 증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이러한 증가된 재정을 바탕으로 동로마 군단 소속 병사들의 급여를 올려주었는데, 이에 동로마 제국의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군단에 합류하였고, 덕분에 이전의 황제들처럼 이민족 출신의 용병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디라키움과 '다라'에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였고, '트라키아' 반도에는 56Km에 달하는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쌓았다.
종교 갈등과 최후
아나스타시우스는 즉위 할때부터 종교적 문제에 시달렸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단성론은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이단으로 지정되어있었지만, 많은 주교들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성론을 설파하고 있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청색당'과 '녹색당'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대다수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둘 중 하나의 단체에 소속되어있었다. 이 단체는 정치적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는 아니었지만, 여러 사회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충돌하곤 하였는데, 이 단성론에 관한 문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512년 아나스타시우스는 단성론자였던 자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유페미우스를 파면하고, 단성론자인 측근을 새로 주교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에 녹생당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지만 반란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트라키아의 군단 사령관인 '플라비우스 비탈리아누스'가 이 조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비탈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여 내륙에 닿아있는 부분을 포위하였지만, 아나스타시우스가 종교적 문제에 대해 해결하겠다고 협상하면서 일단 물러났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이후 몇차례 군단을 보내 비탈리우스를 공격하게 하였지만, 비탈리우스는 이를 격파하고 세를 불렸다. 514년에 다시 비탈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였는데, 이번에는 200척에 달하는 함대까지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아나스타시우스는 이번에도 주교들을 복귀시키고, 공의회를 개최하여 단성론 금지를 약속하였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515년에 비탈리우스는 세번째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아나스타시우스가 보낸 함대에 패배하였다. 비탈리우스는 트라키아 북부로 도주하였으며, 군대를 해산시키고 잠적하였다. 그의 측근들은 체포되어 처형당하였지만, 비탈리우스는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이미 80대의 고령이었지만, 자식이 없어 정식 후계자가 없었다. 대신 3명의 조카가 있었기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3개의 의자를 두고 그 중에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는 조카를 후계자로 선택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 의자에 두명의 조카가 앉아서 결정을 할 수 없었고, 결국 다음날 자신을 가장 먼저 찾아온 이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기로 하였다. 그 인물은 근위대장이었던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였고, 518년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망하면서 유스티누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실제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인건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