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동로마 제국 여덟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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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

농부 출신의 군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는 450년 '일리리쿰' 지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인이 된 지역 속주민으로 가난한 하층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릴적부터 농업에 종사하다가, 10대 시절에 이민족의 침공을 피해 콘스탄티노플로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이때 유스티누스는 한푼도 가진게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의 경비대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이 선택으로 그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는데, 유스티누스는 군생활에 상당히 잘 적응한 것 같은데, 아예 고향에 남아있던 아내 '에우페미아'까지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이고, 본격적으로 전문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유스티아는 동로마 군단의 병사로 '페르시아'와 '이사우리아족'과의 분쟁에서 활약하여 지휘관으로 승진하였고,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눈에 들어 근위대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한 유스티누스였지만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가문의 후계자로 두기 위해 여동생의 자식인 조카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를 양자로 데려와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로 개명하게 하였다. 이때 유스티누스는 근위대의 장교이자 원로원 의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황제 즉위

아나스타시우스는 말년에 후계자가 없어, 자신의 조카 3명 중에 한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3개의 의자를 준비한 후에 자신이 원하는 의자에 앉은 조카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이 조카들은 한 의자에 두명이 앉는 등 기행을 벌여, 아나스타시우스가 원하는 의자에 앉은 조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나스타시우스는 이번에는 다음 황제의 자리를 신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후계자로 삼기로 하였는데, 그게 바로 황실의 근위대장이었던 유스티누스 였다고 한다. 이는 참으로 믿기 힘든 이야기 이기도 하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518년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망하자, 환관이었던 '아만티우스'가 근위대장인 유스티누스에게 근위대를 매수할만큼 충분한 양의 황금을 주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다음 황제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이 황금을 독차지하고서는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무장을 하고 황궁의 질서를 바로 잡으라고 했다고 한다.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사실상 황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근위대의 추대를 받아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어느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방식으로 황제가 되었든 정통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이 때문인지 유스티누스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금액의 돈을 지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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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무식 황제

유스티누스는 속주 출신의 가난한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어서, 당시 동로마 제국 고위층에서 주로 사용하는 그리스어는 거의 문맹에 가까워 철자도 몰라서 미리 준비된 서판에 그대로 서명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평생 군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외의 분야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떨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양자인 유스티니아누스가 상당한 분야에서 그를 보좌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사실상 국정 전반을 전담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519년에 동로마 제국에서 로마의 교황청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교황이 교회의 수장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현대 교회의 서열이 정리되었으며, 484년에 시작된 '아카키오스 분열'이 종결되었다. 525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서커스단 출신의 여자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있도록, 고위 관리가 하층민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한 법을 폐기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자신의 아내도 하층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결국 허락하였다고 한다. 526년에 시리아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안티오크'가 파괴되었는데, 이를 수복하는 작업을 지시한 유스티누스는 건강의 이상을 느꼈다고 한다. 유스티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여 정식 후계자로 삼았고, 이듬해인 527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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