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로마 제국 여섯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제노」
- 역사
- 2023. 5. 17.
아나톨리아 출신 황제
'플라비우스 제노'는 425년경 태어났는데, 그는 로마인이었지만 정확히는 아나톨리아 지역의 타우루스 산맥에 사는 산악민족인 '이사우리아족' 출신이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레오 1세) 황제가 당시 동로마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게르만계의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아스파르'를 견제하기 위해 이사우리아 출신들을 대거 발탁하면서, 족장이었던 제노는 트라키아 지역의 동로마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노의 원래 이름은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데오테스'였으나, 이때 레오 1세의 딸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와 결혼하면서 그리스식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473년 레오 1세는 72세의 고령의 나이였는데, 그는 후계자로 제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플라비우스 레오'(레오 2세)를 지명하고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레오 1세는 이듬해 사망하였는데, 새로 황제가 된 레오 2세는 당시 7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인 제노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가 레오 2세가 병사하였기 때문에, 제노는 동로마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반란
475년 제노는 단독황제가 된지 1년도 채되지 않아 콘스탄티노플에서 쫒겨나게되었는데, 레오 1세의 황후인 '아일리아 베리나'가 남동생인 '바실리스쿠스'와 함께 내란을 일으켰다. 제노는 이사우리아족이 사는 산악지대로 도망쳤고, 이에 바실리스쿠스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이사우리아 출신 군단 지휘관인 '일루스'에게 제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루스는 제노의 동생인 '플라비우스 롱기누스'를 인질로 잡아서 제노를 끌어내려하였는데, 이때 바실리스쿠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사우리아족 출신의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배신하고 제노에게 합류하였다. 한편 베리나의 애인도 바실리스쿠스에 의해 살해 당했기 때문에, 바실리스쿠스는 베리나의 지지도 잃게되었다고 한다. 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칼게돈 공의회'에서 결정된 내용을 뒤집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폐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476년에 콘스탄티노플에 큰 화재가 나면서 완전히 지지를 잃게 되었고, 일루스와 함께 돌아온 제노에 의해 폐위되었으나, 목숨은 건져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로 유배되었다. 이즈음 서로마에서는 동로마에서 파견된 황제인 '율리우스 네포스'가 쫒겨났으며, 서로마는 '오도아케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는데, 동로마 내부를 정리하는데만도 벅찼던 제노는 이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479년에는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가 자신의 아내인 ' 레온티아'가 더 황실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일루스의 집을 불태우고 황궁 앞까지 진격하였지만, 급히 이사우리아 군단을 이끌고 돌아온 일루스에게 진압되어 반란은 실패하였다. 이후 마르키아누스도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로 유배되었다. 두번이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준 일루스는 동로마 군단 총사령관으로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노를 견제하기 위해 동생인 롱기누스도 계속해서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베리나가 일루스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고, 이 때문에 수차례에 걸쳐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결국 484년 이번에는 일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일루스는 처음에는 마르키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지만, 이후에 제노가 반란 진압을 위해 보낸 '레온티우스'와 합의하여, 다시 레온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동로마의 백성들은 계속되는 반란에 지쳐있었고, 제노 뿐만 아니라 이사우리아인 출신인 일루스도 싫어하였기 때문에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다. 결국 제노는 다시 동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동고트족'의 '플라비우스 테오도리쿠스'(테오도리크)에게 진압을 명령하였고, 반란군은 '안티오키아' 인근에서 격파되었다. 일루스와 레온티우스는 후퇴하여 요새에서 4년간이나 농성하였지만, 488년 결국 테오도리크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이후 테오도리크에게 서로마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오도아케르를 처단하면 그 영토를 대가로 주겠다고 하여, 동로마에서 골칫거리가 되었던 동고트족도 서쪽으로 보내버렸다. 이로서 동로마 국내는 그나마 평화로워질 수 있었다.
최후
제노가 통치하는 동안에는 반란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도 동로마를 흔들어 놓았는데, 기독교적으로는 48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는 '아카키오스 분열'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 제노의 이교 탄압 정책에 반발하여 유대 지역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유스타'를 왕으로 선출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제노는 로마의 소수민족인 것도 있어 별로 인기가 없었고, 비단 인기 문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많은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통치를 이어갔다. 491년 제노가 사망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가 땅에 묻히고나서, 그 자리에서 사흘간이나 꺼내달라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는데, 모든 사람이 황제를 싫어했기 때문에 못들은 척하였다고 한다. 제노의 동생 롱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여러번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재산을 기부하는 등 인기유지를 위해 상당히 신경을 썼기 때문에, 제노의 후계자로 유력한 후보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이사우리아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기 때문에, 황후인 아리아드네는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