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로마 제국 세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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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

군인출신 동로마 황제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는 396년 '트라키아'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자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으나,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하였다. 마르키아누스는 동로마에서 '페르시아'와 '반달족'과의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431년에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 인근의 전투에서 반달족에게 사로잡혔는데, 이때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에게 끌려가서 다시는 반달족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풀려났다고 한다. 이후 동로마의 실세였던 군단 총사령관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아스파르'의 휘하에 합류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450년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누이인 '아일리아 풀케리아'와 형식적인 혼인을 하고 다음 황제로 추대되었다. 마르키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된 것은 테오도시우스 2세 통치기에 실권을 잡았던 환관인 '크리사피우스'를 견제하기 위한 이유가 컸는데, 그는 크리사피우스와 또 다른 실세인 '노무스'를 숙청하였으며, 군인 출신 답게 '훈족'에게도 강경한 정책을 펴서, 그 동안 훈족에게 공물을 보낸 던 것을 중지시켰다. 이러한 강경한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훈족의 침입을 걱정하였지만, 당시 훈족의 왕 '아틸라'는 동로마보다 서로마 쪽에 관심이 더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많은 재정을 아낄 수 있었다. 또 훈족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려있는 틈에 다뉴브 강 인근 지역에서 동로마의 영향력을 회복하였으며, 아틸라 사망 이후 훈족에게서 독립한 '동고트족'을 동로마 내부로 받아들이는 등 이민족과의 사이에서 평화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노력하였다. 그는 시리아나 이집트 지역에서 유목민족들과 사소한 분쟁을 겪기도 하였지만,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의 전쟁에는 끼어들지 않았는데, 그것이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는지, 개인의 맹세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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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게돈 공의회

훈족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서 재정적으로 상당히 여유를 가진 마르키아누스는 자신의 지지자인 원로원 계층에 세금을 감면시키는 등 혜택을 주었다. 또 광직 매매 등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해결하기 위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서 유능한 행정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보다 종교에 대한 정책이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451년에 황후 풀케리아와 함께 교황 '레오 1세'와 협력하여 '제4차 칼게돈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공의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칼게돈 공의회에서 단성론을 부인하고 이단으로 규정하였으나,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의 주교들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단성론을 주장하였다. 또 테오도시우스 2세 때부터 계속되던 이교에 대한 탄압도 이어졌는데, 이교를 믿는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처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지방 관료들에게 벌금을 물리는 등의 정책도 시행하였다.

최후

카르키아누스는 457년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통치는 7년에 불과하였지만 동로마의 재정을 충실히 하는데 상당히 기여하였다. 온화한 성품을 가진 마르키아누스가 집권하는 동안 동로마는 평화로운 시기를 구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이 시기를 '동로마의 황금시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풀케리아와는 형식적인 혼인 상태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후계자가 없었고, 실세였던 아스파르에 의해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가 다음 황제로 추대되었다. 마르키아누스는 사후 동방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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