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로마 제국 첫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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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동로마 제국 첫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는 377년경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로 테어났다. 이 시기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의 공직에서 은퇴하여 히스파니아에서 은거하고 있었는데, 378년에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플라비우스 그라티아누스'의 명을 받고, 로마 제국 영내에서 날뛰는 고트족을 진압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379년에는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아예 공동 황제로 선포되어 제국의 동방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이에 아르카디우스는 일개 로마 제국 시민의 아들에서, 일약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이 되었다. 아르카디우스는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였으며, 말과 행동이 굼뜨고 늘 졸린듯한 표정이었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성격도 유약하고 머리도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383년에 아르카디우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공동황제로 선포되어 사실상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이후에는 동생인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와 함께 공동황제로서, 로마 제국을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아르카디우스가 동방을 통치하게 되었을 당시 17세의 나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재상인 '루피누스'가 섭정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동로마와 서고트족

'서고트족'은 테오도시우스 1세 통치기간에 로마로 이주하여 '포이데라티'로서 로마 제국에 군사력을 제공하고, 대신 이주할 수 있는 영토와 지원금을 보장받았었다. 그러나 황제가 된 아르카디우스는 서고트족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였고, 이에 서고트족은 '알라리크'를 왕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서고트족은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정도의 실력은 없었기 때문에, 방향을 돌려서 그리스 지역을 유린하여,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당시에 로마의 주력 군단은 로마 군단 총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의 지휘하에 서로마 영역이 로마시에 주둔해 있었고, 나머지 군단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페르시아'를 비롯한 로마 제국의 적들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빈 공간을 서고트족이 밀고 들어온 것이다. 이에 놀란 아르카디우스는 급히 스틸리코에게 동로마 소속의 군단을 돌려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 동방과 서방으로 분리되어있기는 하나 하나의 제국이라는 체계 안에 있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자기 휘하의 군단을 이끌고 급히 그리스 지역으로 이동하여 알라리크를 저지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루피누스를 대표로하는 관료들은 이러한 스틸리코의 움직임에 의심을 품었다. 그들은 스틸리코가 알라리크를 몰아낸 이후에 콘스탄티노플까지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아르카디우스를 움직여서 스틸리코의 동로마 군단의 지휘권을 박탈하였다.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에게 동로마 군단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보내고, 서로마 군단을 이끌고 즉시 동로마의 영역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는 남겨두고 그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396년 동로마 소속의 군단은 '동고트족' 출신 지휘관이었던 '가이나스'가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있던 군단 병사들이 루피누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스틸리코가 루피누스의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후 루피누스가 쥐고 있던 실권이 환관이었던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넘어간 것을 보면, 다른 음모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이 사건으로 인해 스틸리코는 동로마에 있던 모든 재산을 몰수 당했으며, 동로마에서 로마의 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에우트로피우스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프랑크족' 출신의 미녀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를 아르카디우스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도 야심이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뒤에서 아르카디우스를 조종하기 위해 에우트로피우스와 경쟁한 것 같다. 어찌되었든 스틸리코가 서로마로 물러나자 알라리크는 다시 서고트족을 이끌고 그리스 일대를 약탈하였고, 이를 해결한 능력이 없던 아르카디우스는 사실상 그냥 방치해두었다. 397년 이를 지켜보고있던 스틸리코는 서로마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에 기습 상륙하여 알라리크의 서고트족 군대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고, 그대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여, 사실상 아르카디우스를 반협박하여 '일리리쿰' 지역의 군단 사령관이 되어 정식으로 동로마 관료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틸리코는 정식 동로마의 지휘관을 공격할 수 없었기 떄문에 서로마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본격적으로 동로마와 서로마 간에 균혈이 생긴것으로 보이는데,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이 후견인이자, 서로마의 실권을 쥐고 있던 스틸리코는 동로마의 적으로 선포되어, 동로마에서 배척당하였고, 일리리쿰의 지휘관으로 부임한 동로마 관료가 된 알라리크는, 명목상 동로마 군단을 이끌고 서로마를 공격했기 때문에, 결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로서 동로마의 큰 문제중에 하나 였던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의 문제를 서로마로 떠넘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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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황제가 된 후에 동로마의 실권은 루피누스가 쥐고 있었지만, 곧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 구도도 얼마 가지 못했는데, 399년 동고트족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동로마 군단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가이나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그러나 정작 가이나스는 반란에 동조하였으며, 군단내 로마인들을 살해하고, 그대로 반란군에 합류해 버렸다. 하지만 가이나스는 이 사실을 숨기고, 아르카디우스에게 반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에우트로피우스의 신병을 반란군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아르카디우스는 이를 주저하였지만, 아일리아 에우독시아가 에우트로피우스를 넘겨주도록 부추겼다고 한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하였지만, 몇 달 후에 목숨을 보전해준다는 조건으로 성당 밖으로 나와서 키프로스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이나스는 목숨을 보전해 준다는 약속은 콘스탄티노플에서만 유효하다며, 그를 처형하였다. 한때 가이나스는 동로마의 실권을 잡는 듯 보였지만, 고트족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고트족 출신 병사들을 학살하였고, 가이나스는 다뉴브 강을 건너 국경 밖으로 도피하였지만 훈족에게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그의 머리는 아르카디우스에게 선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에우독시아가 통치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에우독시아는 표면적으로는 방탕한 성품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대립하기도 하였지만, 406년 출산 중 사망할때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후 2년후인 408년 아르카디우스도 아들인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기고 사망하였다. 아르카디우스는 동생인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와 함께 무능한 황제로 유명하지만,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 2세는 나름대로 동로마 제국을 잘 통치했기 때문에, 아르카디우스의 업적으로 테오도시우스 2세를 낳은 것을 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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