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로마 제국 두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 역사
- 2023. 5. 14.
일곱살의 황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2세)는 40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인 402년부터 공동황제로 선포되어 정식 후계자가 되었으나, 406년에는 어머니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가 사망하였고, 408년에 아르카디우스도 사망하면서, 겨우 7세의 나이에 동로마의 정식 황제가 되었다. 아버지인 아르카디우스는 서로마의 황제인 작은 아버지인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와 함께 대표적인 무능한 황제로 불리우지만, 임종을 앞두고 어린 아들이 안정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상당히 고심한 것 같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에서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 동생인 호노리우스와도 사이가 안 좋아졌기 때문에, 마땅히 아들을 믿고 맡길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아르카디우스는 로마의 숙적이었던 '페르시아'의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러한 아르카디우스의 언뜻 안 좋아보이는 결정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야즈데게르드 1세는 로마 황제의 이런 부탁을 매우 영광스럽게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약속은 야즈데게르드 1세가 사망할때까지 지켜져서 동로마는 한동안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 아르카디우스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통치를 도울 사람으로 '안테미우스'를 지정하였는데, 섭정으로 동로마를 통치한 안테미우스는 후에 서로마의 황제가 되는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 탁월한 행정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어린 황제를 성심성의껏 보좌하였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중 하나로 꼽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413년 안테미우스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성벽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우게 된다. 이 시기에 동로마에서는 '서고트족'의 '알라리크'에게 위협당하던 호노리우스를 위해 호위병을 라벤나로 파견하는 등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두번째 섭정
414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섭정이었던 안테미우스가 사망하자, 그 다음으로 테오도시우스 2세 보다 2살 많았던 누나인 '아일리아 풀케리아'가 16세에 '아우구스타'가 되어 섭정 역할을 하였다. 풀케리아는 방탕하고 음란했다고 평가받은 어머니 에우독시아와 다르게 신앙심이 깊고 이지력이 강했는데, 그녀의 영향으로 콘스탄티노플 궁정은 수도원을 연상시킬정도로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풀케리아는 그녀와 그녀의 두 여동생이 평생 순결을 지킬 것을 서약했는데, 이는 일종의 외척들이 테오도시우스 2세의 황제의 자리를 넘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황실의 규모가 확장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 풀케리아의 섭정은 실제로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15세가 되는 날 끝났지만, 그 후로도 계속 영향을 미쳐서 실제로는 본인이 황제의 통치에 제일 많이 간섭하였다. 421년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풀케리아에 의해 그리스의 아테네의 철학자 '레온티우스'의 딸 '아테나이스'와 결혼하였는데, 이교인 이었던 아테나이스는 이때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이름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로 개명하였다. 에우도키아의 영향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의 문화에 헬레니즘의 문화가 융합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425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여기서 학자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로 편찬된 모든 로마법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벌여, 438년에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공표하게 된다. 또 이 해에 법적으로 이교 숭배를 금지하였으며, 이교도의 재판 참여나 군단 복무를 금지하였다. 이듬해인 426년에는 아예 기독교를 버리는 것을 불법화 하였고, 이교의 사원을 파괴하고 이교도들을 최대 사형으로 처벌하는 등 이교에 대한 박해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또 기독교 안에서도 이단에 대한 배척이 확대되어, 427년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를 중심으로 열정적으로 이단을 배척하는 설교가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저항에 부딫혔고, 네스토리우스는 431년에 있었던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파문되어, 페트라로 유배되었다.
이민족의 위협과 최후
동로마는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훈족'을 중심으로한 이민족의 위협에 계속 시달렸다. 421년 페르시아의 '바흐람 5세'가 선전포고하고 동로마로 쳐들어왔으나 격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로마의 최대 위협은 훈족이었는데, 훈족은 동로마 국경지대를 공격하여 약탈을 벌이며, 동로마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내었다. 이 때문에 449년에 실권을 쥐고있던 환관 '크리사피우스'에 의해, 당시 훈족의 왕이었던 '아틸라'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원로원과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실질적인 국방의 문제보다는 훈족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컸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취미였던 사냥에 나섰다가 낙마하였으며, 이로 인해 큰 부상을 입어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풀케리아는 지휘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와 형식적으로 혼인하고 황제로 추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