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 최고의 형벌 기록말살형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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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고대 로마 시대 최고의 형벌

고대 로마의 법은 449년에 제정된 '12표법'을 시작으로 하여, 로마가 발전해 감에 따라 세분화·다양화 되었고, 로마의 영향권이 확장되면서 거의 전유럽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로마법은 438년에 완성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나 530년경에 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로마법 대전)을 통해 정리되었고, 이후 유럽의 국가들의 법에 영향을 주어, 그 영향은 현대의 법에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법 체계를 가지고 있던 로마에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는 형벌이 있었는데, 이것은 '기록말살형'이라는 것으로 당시 로마에서는 사형보다 더 중한 형벌로 취급되었다. 기록말살형은 말 그대로 해당 죄인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는 것이었는데, 단순히 기록되어있는 문서 뿐만 아니라, 새겨진 비문, 동상, 벽화나 그림 등 그야말로 로마의 역사에서 당사자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을 뜻하였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는 역사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또 개인이나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였는데, 이런 로마 사회에서 이러한 형벌은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말살형을 내리기 위해서는 로마 사회의 최고의결기관에 해당했던 원로원의 의결이 필요하였다. 형식적이긴 하였지만, 로마 제국의 황제도 원로원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기록말살형이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기록말살형은 그만큼 로마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형벌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포함하여 사회 고위층 인사가 아니면 형벌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긴 로마의 역사에서도 기록말살형의 대상이 된 인물들도 얼마되지 않았는데, 그나마도 대부분은 여러가지 이유로 형벌이 전부, 혹은 일부 취소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유명한 폭군 중 한명으로 꼽히는 '칼리굴라'는 기록말살형이 내려졌지만, 다음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또 다른 폭군인 '네로'의 경우에는 기록말살형이 집행되었지만, 이후에 '비텔리우스' 황제에 의해 대규모 장례식이 치루어지는 등 후대에 어느정도 복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현제'로 불리우는 '하드리아누스'도 기록말살형에 처해질뻔 했지만,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간곡한 설득으로 원로원이 마음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처럼 기록말살형은 로마 사회의 중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에 남겨서는 안된다고 평가받는 폭군이나, 대역죄인, 사회적으로 심각한 물의를 일으킨 고위층 인사 뿐만 아니라, 그냥 황제나 원로원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일부 기록말살형이 내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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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말살형의 집행

그럼에도 기록말살형이 끝까지 집행된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도미티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스틸리코'가 있다. 도미티나아누스 황제는 생전에 원로원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암살된 이후 원로원에 의해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다음 황제인 '네르바'도 원로원 의원으로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 조치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대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게타는 '카라칼라' 황제의 동생으로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였으나, 형제간에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카라칼라가 직접 살해하였으며, 원로원을 통해 기록말살형을 내렸다. 이는 현직 황제가 직접 실시한 것이기 때문에 이 조치를 중지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스틸리코는 서로마 제국의 군단 총사령관이자 실세였는데, 사실상 정치싸움에서 밀려나면서 숙청당하였다. 이 경우에도 황제였던 '호노리우스'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으로, 당시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잡은 측이 스틸리코의 정적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막힘없이 시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록말살형이 실제로 시행된 경우에도, 로마의 역사에서 완벽하게 지워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는데, 그것은 시대적·사회적 환경의 영향이 컸다. 먼저 기록말살형을 집행하는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형의 집행 대상자가 사회 고위층이었던 만큼, 그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도 자연스럽게 많을 수 밖에 없었고, 비문이나 흉상, 벽화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는 로마가 너무 넓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동수단이나 통신수단이 많이 발전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인 로마에서는 어느 정도 형이 잘 집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든 로마의 영향권 내에 있는 속주나, 도시들에도 기대하기에는 어려웠다. 실제로 폭군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죽이고 기록말살형을 집행하기 위해 몇년 동안이나 제국 전체를 샅샅히 훑었지만, 게타가 새겨진 주화를 모두 찾아서 처리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기록말살형은 형의 집행이 후대에 뒤집히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네로나 '콤모두스'의 경우에도 후대에 결정이 뒤집히면서 이미 훼손된 동상의 복원 명령이 하달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형의 집행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처벌당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 거리가 먼 속주에서는 기록말살형의 집행 명령에 대해 시행을 보류하거나, 파괴나 훼손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창고 구석에 치워두는 식으로 처리하기도 하였다.

근대의 기록말살형

이러한 방식의 처벌은 비단 로마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가까이는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형태의 처벌 방식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러한 방식의 처벌은 근대에도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중국의 '문화 대혁명'을 찾아볼 수 있으며, 소련이나 북한에서도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인물들의 기록이 처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처벌 방식의 의의를 완전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상당히 동의하기는 어려운데, 특히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이유로 사료들이 소실되어 정확한 역사 연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당히 곤란할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폼페이'를 들 수 있는데, 로마에서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 기독교를 국교로 하면서, 기존 로마의 다신교와 관련된 많은 사원이나 신상 같은 종교 관련 사료들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후에 베수비오 화산의 화산재에 덮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폼페이가 발굴되면서, 오히려 그 사건 이후의 로마보다, 이전의 로마에 관한 자료가 더 많이 남아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기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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