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동로마 제국 명장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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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동로마 제국 군단 사령관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는 505년 '일리리아'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젊은 시절부터 동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반 병사부터 시작하여 10년여만에 부대장의 지위에 까지 올랐는데, 이를 눈여겨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 황제의 경호원으로 발탁되었고, 이때 후계자인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와도 면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25년경부터 '이베리아'(현재의 조지아 동부) 지역에서 종교 문제로 인해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이 갈등이 점점 커져 양국간의 전쟁으로 번지자 527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동방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듬해 페르시아는 이베리아를 넘어 '라지카'까지 쳐들어 오면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벨리사리우스는 '탄누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다라 요새'까지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530년 페르시아는 5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라 요새로 쳐들어왔다. 이때 동방 군단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병력을 이끌고 다라 요새로 돌아왔는데, 이때 총 병사가 약 25,000명정도 였다고 한다. 다라 요새는 높은 성벽과 해자로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농성을 하였겠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요새 밖으로 진군하여 회전에 응했다고 한다. '다라 전투'에서 벨리사리우스의 동로마 군단은 거의 두배나 되는 병력의 페르시아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벨리사리우스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다라 전투와 '사탈라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는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 같은데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협상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카바드 1세'는 그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안티오키아' 방면으로 다시 군대를 보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나섰는데, 이를 본 페르시아가 다시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벨리사리우스는 페르시아가 국경 밖으로 쫒아내기 위해 추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군단의 병사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전투를 시작하기를 원하였고, 이를 억제하지 못한 벨리사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전투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531년 벌어진 '칼리니쿰 전투'에서는 동로마 군단이 패배하였고, 벨리사리우스는 잔존 병력을 모아 유프라테스 강을 이용하여 퇴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승리한 페르시아군도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에, 안티오키아를 포기하고 그대로 철수하였다. 이 패배로 인해 벨리사리우스는 동방 총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였다. 하지만 평화협상은 타결되었고,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는 영원한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니카의 반란

고대 로마에서는 전차 경주가 상당히 인기를 끌었는데, 이 전차 경주 팀을 응원하는 일종의 팬클럽같은 형태의 단체가 있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청색당'과 '녹색당'이 있었으며, 대다수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둘 중 어느 한 당에 소속되어있었다고 한다. 청색당은 주로 부유층과 귀족의 후원을 받는 파벌로 전통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녹색당은 상인과 기술자 등 중간계층의 후원이 많았는데 주로 단성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두 당은 정치단체는 아니었지만, 그 규모가 대단했기 때문에, 조직을 이루고 지도자를 선출하였으며, 각종 이권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532년에도 크게 충돌하였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두 당의 지도자들을 엄하게 처벌하면서 불만이 폭발하였다. 평소에도 과중한 세부담과 종교 갈등 등의 문제로 인해 불만이 쌓였있었던 데다, 일부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으로 황제를 교체하기 위해 이러한 불만을 부추겼는데, 성난 양 당 소속 시민들은 황제에게 불만을 표시하였고, 거리로 나아가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감옥을 부수고 관리들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위를 하였고, 이때 원로원 의사당과 '하기아 소피아'가 불에 타버렸다. 그럼에도 폭동은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전임 황제 였던 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여 사실상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하려고 하였지만, 황후 '테오도라'가 그를 꾸짖어 도망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이에 그들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벨리사리우스 등 군단 지휘관들을 불러들였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시민들이 모여있는 전차경기장으로 향하였고, 출구를 막고 학살을 시작하여 약 3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황제로 추대되었던 히파티우스도 체포되어 왔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강제로 추대된 그를 살려주려고 하였지만, 테오도라가 이를 제지하고 처형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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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속주 수복

'니카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벨리사리우스는 많은 지지를 받아 북아프리카 원정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북아프리카 속주를 '반달족'의 손에서 탈환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동고트족'이 장악하고 있던 시칠리아에서 동로마 제국의 함대가 보급을 받을 수 있도록 협의하였고, 반달 왕국에 속해있던 사르데냐의 총독을 사주하여, 반란을 일으켜 반달족의 주력 부대를 본토에서 떨어트려놓았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벨리사리우스에게 약 15,000명의 병력을 주어 북아프리카로 보냈다. 그러나 계획한 만큼 철저히 시행된 것 같지는 않은데, 동로마 제국의 함대는 생각보다 느리게 항해하였고, 하물며 불량 식량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병에 걸렸고, 일부는 사망하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벨리사리우스는 후에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하였는데, 식량 공급업자가 유스티니아누스의 친구였기 때문에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났다고 한다. 그러나 반달 왕국도 만만치 않았는데, 반달족들은 이러한 동로마 제국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군단은 순조롭게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동로마 군단은 '카르타고'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번은 반달족의 '겔리메르'에게 패배하였지만,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달족 군대를 밀어내었다. 겔리메르는 '누미디아'로 피신하였고,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에 입성하였다. 겔리메르는 사르데냐의 주력을 군을 불러들이고, '히스파니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서고트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 성벽을 복구하면서 농성을 준비하였지만, 반달족 대군이 진군하면서 카르타고로 연결된 수도를 끊자, 동로마 군단도 도시를 나왔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군단은 '트리카마룸 전투'에서 겔리메르에게 대승하였고, 겔리메르는 소규모 기병대만 이끌고 다시 누미디아로 도주하였다. 겔리메르는 산속 요새에 숨어들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군단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534년에 항복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공으로 북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자리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선식 중에 선택하게 하였는데, 벨리사리우스는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535년에 벨리사리우스는 집정관에도 임명되었다.

이탈리아 수복

535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로 원정을 보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동로마 군단을 이끌고 먼저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제압하였다. 이듬해에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에 상륙하였고, 도시를 점령하면서 북상하여 나폴리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동고트족은 로마를 포기하고 '라벤나'로 후퇴하였고, 로마 시민들은 교황 '실베리오'를 중심으로 벨리사리우스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휘하에 5,000명의 병사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로마의 성벽을 보수하고 요새화하여 농성하였다. 537년 라벤나에 모인 동고트족 군대는 5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로마에 도착하였는데, 로마시를 완전히 포위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주요 성문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몇번에 걸친 소규모 전투에서 동로마 군단은 승리하였지만, 계속 로마시에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지원을 재촉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농성한지 20일째 1,600여명 정도의 지원군이 동로마 군단에 합류하였지만 전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포위하고 있던 동고트족 군대도 상황은 좋지 못했고,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리던 이들은 휴전 협상에 나서기로 하였다. 그사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도착한 5,000명이 동로마 군단에 다시 합류하였고, 이렇게 되자 포위하고 있던 동고트족이 오히려 위협받게 되었다. 결국 동고트족은 로마를 포기하고 다시 라벤나로 퇴각하였는데, 이때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추격하여 '밀비우스 다리'에서 큰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538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낸 지원군에는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명장으로 불리우는 나르세스도 있었는데, 두 지휘관은 곧 반목하였다. 두 지휘관이 반목하면서 휘하의 지휘관들도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움직였고, 결과적으로 이 때문에 '메디올라눔'이 동고트족에 함락되었다. 이때 메디올라눔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결국 이 소식을 들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나르세스를 소환하였고, 벨리사리우스가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540년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을 평정하여 안정시키고,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를 포위하였다. 라벤나는 천혜의 요새로 함락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벨리사리우스는 물에 독을 풀고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 여러 방법으로 항복하도록 압박하였다. 그러나 이때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다시 임박해 옴을 느끼고, 동고트족과 평화협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이 협상에 반대하였는데, 이미 라벤나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상황이 위급했던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추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라벤나에 입성하자 동고트족 수뇌부를 모조리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동고트족을 속여 라벤나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러한 벨리사리우스의 태도에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다시 페르시아와 동고트족

540년 페르시아는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지역에 신경쓰는 사이에 시리아 지역으로 쳐들어와서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은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키고 30만명에 달하는 시민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동로마 제국은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541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고 불리우는 전염병이 돌아서 큰 피해를 입었다. 벨리사리우스는 541년 말에 다시 동방에 파견되었는데, 동로마 군단은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몰아냈지만, 별다른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면서 계속 페르시아군을 견제하였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철수하였지만 542년 벨리사리우스는 모함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가 자리를 비운 이탈리아에서 다시 동고트족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544년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번에는 겨우 4,000명의 병사들만 모집하여 545년에 라벤나에 상륙하였다. 하지만 이런 군세로 동고트족에 정면에서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벨리사리우스는 동고트족에게 빼앗긴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다시 탈환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었다. 546년 지원군과 합류한 벨리사리우스는 동고트족에게 포위 당한 로마시를 구원하기 위해 테베레 강 하류에서부터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내응하기로 한 로마시의 수비대는 움직이지 않았고, 후방에 있던 보급기지가 위험해지면서 철수하였고, 결국 로마는 동고트족에게 다시 함락되었다. 이듬해 동고트족이 '아풀리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하였는데, 벨리사리우스는 이 틈을 타고 다시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동고트족은 다시 돌아와서 로마를 공격하였는데, 별 소득이 없자 그냥 아풀리아 지역을 점령하러 떠났다.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을 받고 다시 '루카니아'를 방어하기 위해 급히 내려갔는데, 도중에 동고트족의 기습을 받아 피해를 보았고,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퇴각하였다.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루카니아를 회복하기 위해 몇차례 시도 하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실패하였고, 콘스탄티노플에 요청한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계속 시칠리아에 있던 벨리사리우스는 549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당하였고, 이때 은퇴를 권고당하였다고도 하고, 혹은 스스로 사직하였다고도 한다.

마지막 전투

558년 훈족의 일부가 '다뉴브 강'을 건너 쳐들어왔는데, 그 중에 일부가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넘어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왔다고 한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은퇴한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호출하였는데, 7,000명의 기병을 상대로 300명의 병사들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훈족은 동로마 군단을 기습하려고 하였는데, 벨리사리우스가 먼저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약 4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한다. 그들은 동로마 군단의 지휘관이 벨리사리우스라는 것을 알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벨리사리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하려고 하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제지하고 그들과 평화협상을 하였고, 동로마 제국은 매년 황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샀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공적으로 자신이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이 마지막 전투를 끝으로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은거하였는데, 562년 유스티니누스가 사경을 헤메었는데, 이때 시중에는 벌써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때 일부 귀족들이 벨리사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다고 한다. 정신을 차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들을 체포하였는데, 벨리사리우스도 체포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재산을 몰수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곧 무혐의가 밝혀져서 복권되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끝까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의심받았던 것 같다. 벨리사리우스는 565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래도 황제의 의심을 산 명장치고는 비교적 온전하게 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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