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 최고 의결 기관 원로원 「세나투스」
- 역사
- 2023. 5. 24.
로마 원로원
고대 로마를 가리키는 단어로 흔히 SPQR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알려져있다. 이처럼 '원로원'(Senatus)이란 로마를 대표하는 정치기구로 로마 구성원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로마의 입법・사법・외교・행정 전반에 걸친 의사결정을 하는 기관이다. 이러한 로마 원로원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로마 원로원은 고대 로마 왕정 시절에는 주로 왕의 통치 행휘에 대한 조언자의 역할을 했는데, 당시에는 주로 로마의 오래된 귀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귀족 연합체에 가까웠다. 로마는 그 시작과 동시부터 주변 민족과의 융화가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방식의 흡수 확장 정책으로 로마는 다민족・다문화・다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면모를 갖게되었다. 로마의 두번째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는 이미 로마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라틴 민족이 아닌 '사비니족' 출신이며, 5번째 왕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적국인 '에트루리아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왕위에 대한 세습을 인정하지 않고, 출신 성분보다 능력위주의 계승구도를 가지고 있던 로마에서는, 로마의 정체성을 계속 이어나가는 기관으로서 원로원이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로마 공화정의 중심
로마에서는 로마의 일곱 왕 중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쫒아내면서 더 이상 왕을 뽑지 않기로 하였다. 군주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 로마에 필수 불가결했던 것이 바로 원로원인데,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 시절에 로마의 핵심기구로서 로마의 역사에 자리잡았다. 직접적인 행정사무나 군사적 업무 등은 집정관으로 대표되는 로마의 선출직 공직자들이 맡아서 운영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실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로마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는 원로원에서 논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나 원로원도 처음에는 왕정 시절처럼 귀족정의 형태로 시작하였지만, 점점 공화정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로마의 영향권이 점점 넓어지면서 로마시 또한 계속해서 확장되었고, 그 만큼 많은 수의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반 평민계급 '플레브스'의 역할이 점점 넓어지면서, 더 이상 소수 귀족인 '파트리키'들에 의한 권력 독점이 불가능해졌고, 몇번의 갈등 끝에 점차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은 서로 권력을 공유하게 되었다. 로마는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 발전된 문명이었던 인접한 그리스 지역의 민주주의 제도를 많이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로마의 공직자들은 민회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으며, 평민을 대변하는 '호민관'을 중심으로 입법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따라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이나 '호르텐시우스 법' 등이 제정되면서, 많은 들도 로마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되었지만,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따른 여러 부작용들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발전되어있기는 했지만, 그를 뒷받침 해줄만한 법과 규정이 제대로 만들어져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소위 인맥, 재산, 지위를 이용해서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3가지를 평민들보다 더 많이 확보하고 있던 귀족들이 선거에서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 민회에서 표결을 통해 평민의 의견을 표현할 수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최고 의결기관인 원로원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도하다. 이에 대적하기 위해 평민들은 끊임없이 제도개선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사이에서 로마의 발전에 따라 많은 부를 쌓은 일부 평민들이, 평민계급, 또는 귀족계급과 손을 잡고 자신의 부를 기반으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들 '에퀴테스'라고 하여 신흥 귀족계급으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되자 평민과 귀족을 막론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목적을 위하여 재산과 지위, 인맥을 얻기위해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금권선거나 폭력을 통한 개입, 뿐만 아니라 아예 정적을 암살하는 등의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로마는 계속하여 발전하며 확장되었지만, 결국 이러한 원로원을 대표로하는 기득권층의 부패가 공화정의 붕괴를 불러오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원로원
로마는 황제를 중심으로하는 제정으로 이행하였지만, 그럼에도 로마 원로원은 살아남았다. 로마 원로원은 표면적으로는 황제를 정식으로 승인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특정인물을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거나 로마 최고형인 '기록말살형'을 내릴 수 있는 등 로마를 대표하는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는 사실상 황제의 자문기구 정도로 전락했으며, 황제의 성향에 따라 완전히 무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원로원에서도 끊임없이 자신들의 실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공작을 하기도 하여, 황제의 권약을 약화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거나, 황제를 암살하기도 하였다. 황제도 이러한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 의원의 숫자를 조정하거나, 자신의 영향력이 큰 속주의 속주민들로 원로원을 체우는 등의 노력을 하였고, 그 중에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반역죄를 통한 숙청이었다. 그나마도 로마 제국 초기에는 원로원과 황제 사이에서 어느정도 권력의 견제 구도가 성립되었다면,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로원이 일방적으로 약해지기 시작하여, 소위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와서는 군사력이라는 무력에 굴복하여 황제의 거수기 수준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로마 제국이 '도미나투스'(전제정)로 이행하면서 원로원의 역할은 거의 없어졌는데, 이를 농담삼아 원로원은 전차 경주에서 시작 신호를 보내는 역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층 더 나아가 '콘스탄티누스 1세' 때에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삼아 '노바로마'로 바꾸면서, 후에 이름이 바뀐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에 새로운 원로원이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노플 원로원도 그 기능은 거의 없고 실상은 황제의 자문기관에 불과하긴 했으나, 어찌되었든 명목상의 기능을 계속 유지한데 반해, 로마의 원로원은 더욱더 쇠퇴하게 되었다. 후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로마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의 수도로서 원로원도 어느정도 기능하고 있었다고 하면, 서로마는 라벤나나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이 수도로 기능하였고, 로마시는 서로마의 대도시이자 교황이 있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황제들에게 기피되어 로마 원로원의 기능도 기대할 수 없었다.
로마의 멸망과 원로원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는데, 사실 로마 원로원은 그 후에도 존속되었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는 왕이되어 통치하였지만, 기존 로마의 행정체계는 그대로 유지시켰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이후 오도아케르를 처단하고 이탈리아 일대를 차지한 '동고트족'의 '테오드리크'도 계속해서 로마 원로원을 유지시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로마 원로원을 없에버린 것은 바로 동로마 제국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로마시를 수복하였는데, 그 이후에 로마는 황폐화 되었으며 이때 로마 원로원도 해산시켜버렸다. 그러나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플 원로원은 존속되었고, 동로마 제국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이러한 로마의 정치 형태는 현대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상원(Senate)은 원로원(Senatus)에서 온 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장점 뿐만 아니라 단점도 계승하고 있어, 현대 정치에서 일어나는 정치인의 부패나 정치 공작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