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동로마 제국 아홉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 역사
- 2023. 5. 20.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황제의 아들로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는 482년경 '다르다니아 타우레시움'에서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집안은 하층민으로 보잘것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오빠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직업 군인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큰 공을 세운 적은 없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군대에서 상당히 활약한 것 같고, 근위대의 지휘관으로 승진하였으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승승장구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혈연인 여동생의 아들 유스티니아누스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여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양자로 삼아 사실상 가문의 후계자로 정하였다. 518년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는데, 당시 근위대장이었던 유스티누스는 근위대를 이용하여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근위대장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시골 농부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행정적인 부분에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근위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구도는 유스티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유스티니아누스가 통치의 상당 부분을 직접 담당했다고 하기도 한다. 519년 로마의 교황청으로 사절을 보내 '아카키오스의 분열'을 종결시킨 것도 유스티니아누스의 주도로 행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521년에는 집정관과 동로마 군단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명실공히 제국의 2인자로서 정무를 보았다. 525년에는 서커스단 출신으로 알려진 최하층민인 '테오도라'와 혼인하였는데, 이를 위해 높은 신분의 남성이 하층민의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한 법을 폐기하기도 하였다. 526년에 고령인 유스티누스는 건강에 이상을 느끼자,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여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이듬해에 유스티누스가 사망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 로마 제국이라고 부르고, 주민들도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지만 이미 기존의 로마 제국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는 비잔티움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 집권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영토내에 로마시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더 나아가 이미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유일한 국교로 인정하고, 여러차례에 걸처 로마 다신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고 탄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상 로마의 정체성을 상실한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법은 로마법을 계승하였다. 기원전 450년 로마에서 최초의 성문법으로 '12표법'을 제정한 이후, 수많은 법들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438년에 한번 '테오도시우스 법전'으로 정리된 적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에 즉위하자 당시의 혼란스러운 법을 한번더 정리하고자 하였는데, 그는 '트리보니아누스'를 중심으로 하는 10인 위원회를 세워 그 일을 맡겼다. 이 작업은 공식적으로 527년부터 시작하였으며, 모순되거나 중복되는 내용을 제거하고, 불필요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법들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정리된 법전은 529년부터 시행하였으며, 이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로마법의 개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유스티니아누스가 사망할때까지도 계속해서 개선을 진행하였다.
페르시아와의 갈등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는 525년경 '이베리아'(현재의 조지아 동부) 지역에서 종교 문제로 갈등이 있었는데, 페르시아의 '카바드 1세'는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유스티누스에게 자신의 아들인 '호스로 1세'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스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런 제안에 호의적이었던 것 같지만, 일부 대신들이 반대하면서 여론이 안 좋게 되자 요청을 거부하였고, 결국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527년 이전까지 두 나라의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는데, 대신 동맹국을 이용하여 일종의 대리전 형식으로 공방이 계속되었다. 527년 동로마 제국은 페르시아의 '니시비스'를 공격하였다가 격퇴되었는데, 이때 유스티누스의 경호원이었던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를 막기 위해 동로마 제국 동방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고 한다. 528년에 페르시아가 이베리아를 넘어 '라지카' 지역까지 공격해오자 벨리사리우스가 이에 맞섰는데, '탄누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은 대패하여 '다라 요새'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승리한 페르시아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530년 페르시아는 다시 대규모로 침공하였고, 벨리사리우스는 다라 요새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페르시아는 동로마 제국의 두배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왔는데, '다라 전투'에서 벨리사리우스의 매복과 각개격파 전술에 말려들어 패배하였다. 같은 시기 페르시아는 아르메니아에도 쳐들어갔는데, '사탈라 전투'에서도 동로마 제국에 패배하여 후퇴하였다. 페르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안티오키아' 방면으로 쳐들어왔는데, 동로마 제국 군단이 나타나자 다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페르시아 군대가 국경 밖으로 철수 할 때까지 견제할 목적으로 추격한 것 같은데, 군단의 병사들이 전투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칼라니쿰 전투'에서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페르시아에 패배하였지만, 페르시아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대로 철수하였다고 한다. 531년 카바드 1세가 죽고 호스로 1세가 즉위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와 평화협상을 시도하였고, 532년에 영구적인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동로마 제국은 상당한 양의 황금을 배상금으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540년 페르시아는 동로마 제국이 서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 일대를 약탈하고, 라지카 지역으로 침공을 개시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벨리사리우스가 다시 파견되어 방어하였으나, 544년 소환되어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졌고,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545년에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는 5년간의 휴전협상을 맺었고, 이후 휴전 연장과 소규모 국지전이 반복되다가, 561년에 50년간의 휴전협정이 타결되었다. 이 협상으로 페르시아는 라지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지만, 대신 로마는 매년 페르시아에 황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서로마 제국의 영토 수복
옛 로마의 북아프리카 속주 지역은 '반달족'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 반달왕국의 왕 '힐데리크'는 친가톨릭 정책을 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와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530년 사촌이었던 '겔리메르'가 약탈을 일삼던 '베르베르인'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다며 힐데리크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구실로 반달족과 전쟁을 선포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본격적인 침공은 533년에 시작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전쟁에 상당히 신경쓴 것 같다. 동로마 제국은 당시 반달 왕국에 속해있던 사르데냐의 총독과 접촉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여, 반달 왕국의 주력 부대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동고트족'과도 동맹 관계를 강화하여, 시칠리아 지역에서 동로마 군단이 보급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동로마 군단은 '카르타고' 인근의 '아드 데키미움'에서 반달족 군대와 맞붙었는데, 주력 부대가 없는 겔리메르는 한번은 싸움에서 승리하였지만, 동로마 군단에 격파되어 '누미디아'로 피신하였다. 이후 겔리메르는 사르데냐의 주력군을 불러들였고,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겔리메르의 반달족은 '트리카마룸 전투'에서 완패하였고, 벨리사리우스는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 반달 왕국에 속해있던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였다. 534년 도주한 요새에서 포위되었던 겔리메르가 항복하였고,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은 526년에 10세의 어린 '아탈라리쿠스'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어머니인 '아말라순타'가 섭정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아탈라리쿠스가 534년에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아말라순타는 이후 스스로 여왕이 되었다. 하지만 동고트의 귀족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고, '테오다하두스'를 왕으로 추대하여 공동 왕으로 삼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말라순타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비밀리에 유스티니아누스와 서신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곧 발각되었고 아말라순타는 535년에 유배되었다가 암살당했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은 이를 빌미로 동고트족이 장악하고 있던 이탈리아로 침공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와 '달마티아' 양쪽으로 쳐들어가서 제압하였고, 이듬해인 536년에는 이탈리아로 상륙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나폴리까지 점령하자, 동고트족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테오다하두스를 폐위시키고, 새로 '비티게스'를 왕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비티게스는 벨리사리우스와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를 포기하고 라벤나로 철수하였다. 이렇게 되자 로마 시민들은 교황의 주도로 벨리사리우스에게 항복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로마를 장악하였지만 적은 병력 때문에 동고트족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로마를 요새화 하기로 하였다. 이윽고 537년에 비티게스라 5만명이 동고트족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벨리사리우스는 5천명의 군대로 이를 방어해야 했다. 하지만 동고트족은 치열한 공격에도 로마시를 함락할 수 없었고, 비티게스는 로마를 포위한 채로 보급을 막아 압박하였다. 동고트족은 우세하였지만, 보급과 전염병의 문제로 고통받고 있었다. 거기다 로마시에 소규모 이지만 동로마 제국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동고트족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동로마 제국에 넘기는 조건으로 평화협상에 나섰다. 벨리사리우스는 이 협상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당장의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두 군대는 일시적으로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서 대규모 지원군이 합류하자, 벨리사리우스는 국지적으로 소규모 분쟁을 이유로 휴전을 종료하였다. 결국 538년 비티게스는 라벤나로 회군하였는데, 이때 동로마 제국의 추격을 받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의 지원군에는 '나르세스'도 포함되어있었는데,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곧 반목해 버렸다. 두 지휘관은 서로에 대해 비협조적이었고, 이 때문에 539년 '메디올라눔'을 동고트족에게 빼앗겼는데, 이때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결국 나르세스는 이에 대한 책임문제로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다. 그 사이 벨리사리우스는 착실히 전쟁을 진행하여 라벤나까지 포위하였다. 비티게스와 동고트족은 완전히 포위되어 풍전등화의 상태였는데, 그 동안 페르시아의 침공을 염려한 유스타니아누스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보낸 협상 사절이 도착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미 승기를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협상을 거부하였는데, 상황이 급박해진 동고트족이 벨리사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벨리사리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라벤나로 입성하자 비티게스와 동고트족의 귀족들을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자신과 반목하던 벨리사리우스가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인 것을 알게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때부터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의심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티게스가 체포되고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를 막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있는 동안, 남은 동고트족들은 '헬데바두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군단은 지휘계통이 분산되어있었고, 현지인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면서 민심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동고트족은 빠르게 공격하여 많은 지역을 되찾았다. 하지만 힐데바두스는 541년에 암살 당했고, 새로 '에라리크'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 에라리크는 동로마 제국과의 협상을 주장하였는데, 그가 유스티니아누스와 밀서를 주고받는 것이 폭로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토틸라'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군단은 지지부진한 움직임을 보였고, 토틸라는 542년에 '무켈리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지휘관들은 휘하의 부대들을 이끌고 각각 도시에 틀어밖혔는데, 토틸라 또한 정면으로 상대할만큼 자신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도시를 지나쳐 방어가 소홀한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갔다. 544년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소환된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545년에 이미 남부 이탈리아를 평정한 토틸라는 로마시 향해서 진군하였고, 적은 병력 밖에 없었던 벨리사리우스는 남부지역을 다시 탈환하면서, 콘스탄티노플에 지원병력을 요청하였다. 토틸라는 이미 로마시를 포위하고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지원군은 546년이 되서야 도착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테베레 강' 하구에서부터 전진하여 로마시를 도우려고 하였지만 여의치 않아 퇴각하였고, 결국 로마시는 토틸라의 동고트족 부대에게 함락되었다. 이듬해인 547년에 토틸라가 동로마 제국의 잔존 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 로마시를 나왔는데, 이때 벨리사리우스가 재빠르게 기습하여 로마시를 점거하였다. 토틸라가 다시 돌아와서 로마시를 공격하였지만 격퇴되었고, 이에 동고트족은 철수하였다. 하지만 다시 이동하던 벨리사리우스의 동로마 군단이 토틸라에게 기습을 당하였고, 동로마 군단은 시칠리아까지 철수하였다. 이처럼 별다른 소득도 없는 전쟁을 이어가면서,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는 벨리사리우스는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549년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당하여 은퇴하였다. 550년에 토틸라는 다시 로마시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유스타니아누스는 몇몇 조치들을 취해보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이에 다시 나르세스에게 대군을 맡겨 파견하였다. 552년 나르세스의 동로마 제국 군단과 토틸라의 동고트족 군대가 대규모 회전을 벌였는데, '타기나이 전투'에서 동고트족이 대패하였으며 토틸라는 전사하였고, 나르세스는 그대로 진군하여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이후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친척인 '테이아'를 왕으로 추대하였지만, 553년에 잔존 세력이 나르세스의 군단에 포위되어 섬멸되면서 동고트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552년에는 '히스파니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서고트족에서 내란이 일어나면서 동로마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동로마 제국은 군단을 파견하여 '카르타헤나'를 비롯하여 히스파니아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니카의 반란과 하기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에는 '청색당'과 '녹색당'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는 정치단체는 아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시민 대다수가 가입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단체로 여러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며, 때로 충돌하기도 하였다. 그 중 청색당은 기독교 정통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로 주로 고위 귀족들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녹색당은 단성론을 믿는 상공업계와 궁정관료들의 지지를 받는 세력이었다. 이 두 세력은 일반적으로는 주로 대립하였는데, 두 세력 모두 자유시민의 전통을 이어받은 존재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자들에게는 공동으로 대치하기도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두 세력에 대해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는데, 계속되는 원정으로 인한 과중한 세부담과 주도권을 쥐려고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책동으로 황제에 대한 반발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결국 535년에 두 세력은 연합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사실상 반란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들이 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기에 이르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후인 테오도라가 이를 제지하였고, 나르세스와 벨리사리우스의 활약으로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3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학살당했고, 가담했던 원로원 의원들은 유배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강제로 황제로 추대된 히파티우스를 용서하려고 하였지만, 테오도라가 처형시켰다고 한다. 또 이 과정에서 '하기아 소피아'가 불에 타 소실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재건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자유 시민의 전통이 꺾기고, 절대왕권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종교갈등과 최후
54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전염병이 돌았는데, 유스티니아누스도 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회복하여 병에서 나았지만, 그 이후로 기력이 쇠퇴하고 의심이 많아졌다고도 한다. 또 테오도라가 548년에 사망하였는데, 그 이후부터 더 무기력해졌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종교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은데, 서방과 동방의 화합을 도모한 것 같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단성론자였기 때문에, 단성론을 박해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단성론자들을 후원하였다. 544년 이러한 유스티니아누스의 종교적 입장 때문에 로마 교황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테오도라가 사망한 이후에는 더 종교문제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558년에는 훈족의 후예인 이민족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위협받기도 하였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은퇴한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불러서 이에 대적하게 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들과 평화협상을 하여 매년 황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외적에 대해 황금을 주어 해결하려는 모습 때문에 시민들에게 불만을 샀다고 한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는 83세의 나이로 38년의 집권을 끝내고 사망하였다. 다음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카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 유니오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