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일곱번째 군주 「메흐메트 2세」
- 역사
- 2023. 6. 7.
두번의 즉위
'메흐메트 2세'는 1432년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 '에디르네'에서 '무라트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메흐메트 2세는 위로 형이 두명이나 있었던데다가, 무라트 2세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는지, 태어난지 2년만에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아마시아'로 보내졌다. 그 후 3년뒤 맏형이 사망하자 대신 아마시아 총독의 자리에 올랐다가, 이후 둘째형이 아마시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메흐메트 2세는 '마니사' 총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443년에는 둘째형도 사망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 2세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44년 무라트 2세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마흐메트 2세에게 술탄직을 넘겨주었다. 당시 오스만 술탄국은 헝가리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연합군과 평화협상을 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12세의 마흐메트 2세가 술탄으로 즉위하자 '바르나 십자군'을 결성하여 협정을 깨고 다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마흐메트 2세의 오스만 술탄국은 내외로 혼란스러워졌고, '챤다르가'의 재상을 중심으로 무라트 2세가 복귀하도록 요청하였다. 메흐메트 2세도 아버지인 무라트 2세에게 서신을 보내 복귀하도록 요청하였는데, 본인이 직접 했다는 설도 있고 신하들에게 떠밀려서 보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되었든 복귀한 무라트 2세는 오스만군을 지휘하여,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2년후인 1446년에는 정식으로 술탄으로 복귀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 2세는 술탄에서 퇴위하게 된다. 퇴위한 후에는 본래 총독으로 있던 마니사로 돌아가서 생활하였던 것 같고, 5년 후인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면서, 메흐메트 2세는 다시 한번 술탄의 자리에 즉위하여 생애 두번째로 술탄이 되었다. 다시 술탄이 된 메흐메트 2세가 가장 처음 한 일은 남은 형제들을 살해한 것으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공히 하면서, 오스만 내부의 안정을 꾀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메흐메트 2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오스만 술탄국을 견제하고 있던 '카라만 후국'을 격파하고, 1452년 에디르네로 귀환하면서 '루멜리 히사르' 요새를 건설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하였다. 이 요새는 '보아즈 케센'이라고도 불리웠는데, 해협을 끊는다는 의미이다. 이듬해인 1453년에는 본격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출병하였는데, 처음 술탄에 즉위하였을때부터 계획하고 있던 것을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이름 붙여진 유명한 3중 성벽으로 방비되고 있어 난공불락의 도시였는데, 실제로 오스만 술탄국은 몇번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적이 있었지만, 포위 한 중간에 여러가지 이유로 포위를 풀었으며, 포위한 기간 동안에 비잔티움 제국을 돕기 위해 서유럽에서 몇차례 십자군이 파견되기도 했다. 사실상 몰락의 끝자락에 있던 비잔티움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술탄국에 둘러쌓인 형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랜기간 존속되었는데, 이러한 이유에는 오스만 내부에 존재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데브시르메'를 통해 선발한 관료들을 중심으로 튀르크계 귀족들을 견제하고, 강력한 전제군주로서의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이 시기에 전쟁 양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는데, 화약무기가 발전함에 따라 오스만군의 공성전술도 획기적으로 변화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대형 공성포인 '우르반 거포'를 동원하여 성벽을 직접 두들겼으며, 성벽 아래까지 갱도를 파고 들어가 폭약을 매설하여 터트리는 등 기존의 공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양상을 보였다. 또 육지를 통해 함대를 '금각만'으로 수송하여 공격방향을 다변화하기도 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시민들은 '아야 소피아'에 모여 신에게 기도하였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러한 당시 최첨단의 공격방식을 통해 난공불락으로 유명했던 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을 7주만에 함락시키는 위업을 세웠다. 이로서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로마'는 완전히 멸망하였고, 이후 그리스는 약 400년간 오스만 술탄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콘스탄티니예'로 개명하고,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로 삼았다.
카이사르이자 칼리프인 정복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메흐메트 2세는 선조인 '오르한'이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와 결혼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스스로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면 '카이사르'의 칭호를 사용했다. 메흐메트 2세는 정식으로 공인 받은 것은 아니지만, '칼리프'의 칭호도 사용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이슬람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서유럽에서는 이러한 그의 행위를 무시하였지만, 동방 정교회에서는 동로마 황제인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 후에도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나갔는데, 1459년에는 '세르비아 공국'을 합병하였고, 1460년에는 펠로폰네소스에 남아있던 비잔티움 제국의 일원이었던 '모레아'를, 그리고 1461년에는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있는 같은 비잔티움 제국의 일원이었던 '트라페주스 제국'을 멸망시켰다. 1462년에는 '보스니아 왕국'을 합병하였고, '드라큘라'로 유명한 '블라드 체페슈'의 '왈라키아 공국'도 제후국으로 복속시켰다. 아나톨리아 지역도 완전히 평정하였는데, 1473년 '오틀룩벨리 전투'에서 '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에게 승리하여, 오스만 술탄국의 동부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또 1476년경 크림 반도에 자리 잡은 몽골계의 '크림 칸국'을 복속시켰는데, 이로서 흑해를 실질적인 오스만 술탄국의 바다로 만들었다. 메흐메트 2세는 이렇게 오스만 술탄국의 세력권을 급속도로 확장시켰는데, 이로서 오스만 술탄국은 제국이라고 부르기에 어울릴 만큼의 영향력을 얻었으며, 이러한 그의 업적을 들어 '정복자'(Fatih)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도 늘 승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1456년에는 헝가리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에게 대패한 적도 있었는데, 이후로도 헝가리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별다른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1470년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경쟁하면서 벌였던 '로도스 섬' 공략에 실패하기도 했다. 왈라키아 공국과 싸울때도 초기에 상당히 고전하였으며, 1479년 정복한 알바니아 지역도 10여년에 걸친 알바니아인들의 대항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국의 군주
메흐메트 2세는 정복사업만 활발히 한 것은 아니었는데, 새로 수도로 삼은 콘스탄티니예를 발전시키는데에도 힘을 쏟았다. 아야 소피아는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으며, 무함마드의 제자인 '에윱 알 안사리'의 무덤은 이슬람의 네번째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또 오스만 제국의 상징인 '톱카프 궁전'도 이때 건설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대재상이었던 '챤다르 할릴 파샤'를 반역의 혐의를 들어 처형하였는데, 이는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위해 튀르크계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니예를 이렇게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가 되었지만,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 때부터 계속 살아온 동방 정교회나 서방의 기독교도, 아르메니아 정교도나 유대인도 차별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하였다. 메흐메트 2세 본인은 경건한 무슬림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나 예술가를 모으기도 했고, 자신의 초상화는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젠틸레 벨리니'에게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들의 종교나 문화만을 강요하지 않는 오스만 제국과 메흐메트 2세였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역에서 세계적인 대 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복왕 다운 죽음
1481년에는 아시아로 건너가 이집트 원정을 시도했다고 하는데, 정력적으로 정복사업을 펼친 메흐메트 2세는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시도하다가 죽었다는 어느 의미에서 정복왕 다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사망에 대해 암살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동방에서 오스만 제국이 서방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이 막을 내렸으며, 오스만 제국과 경쟁하고 있던 제노바나 베네치아 등의 도시국가들이 쇠퇴하였고, 대신 오스만 제국과 협력적이었던 피렌체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르네상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에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서면서, 유럽은 본격적으로 '대항해시대'를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