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을 지탱했던 「티마르」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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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병

세금을 징수하는 군대

고대 로마나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의무이자 권리였던 군역에 종사하였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점 상비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상시 유지되는 군대는 그만큼 많은 비용을 필요로 했습니다. 따라서 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상비군을 최소한으류 유지하면서, 필요할때만 빠르게 군대를 이용하기 위하여 용병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용병은 비용의 절감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전쟁터에서 사망하여 생기는 문제를 방지할 수도 있었으며, 비용을 부담할 수만 있다면 공동체 보다 더 큰 규모의 병력을 확보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신뢰도와 성실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이러한 군사적 문제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용병을 이용하기 위한 비용의 문제도 있었는데, 고대에는 국가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구나 재산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실시하기 어려웠고, 정확한 세액을 책정하거나 부과하는 것이나, 애초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군주들은 세금을 단순화하기위해 노력하였고, 세금을 전문으로 징수하는 직업을 따로 두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금을 측정하고 징수하는데에 따른 부담도 무시못할 정도 였는데, 이에따라 군대를 유지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제도가 발전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프로노이아 제도'나, 이슬람 칼리프 국가에서 '이크타 제도' 등이 생겨났습니다. 오스만 제국에도 이러한 제도들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제도가 있었는데, 바로 '티마르 제도' 입니다. 티마르라는 것은 나누어주는 토지의 단위였는데, 특정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토지의 징수권을 나누어주고, 대신 술탄의 요청에 따라 필요할때 '시파히 기병'으로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토지의 징수권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외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징수하여, 그것을 일종의 보수로 받아 생활하였습니다. 이 티마르의 소유주들은 가지고 있는 토지 세수의 규모에 따라 자신을 포함하여 한 두명이 기병으로 소집되었으며, 그 장비의 구입이나 유지 등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봉토를 가지고 있던 기사나, 일본 전국시대 막부에 소속된 사무라이들과도 비슷하지만, 통치권 없이 징세권만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해당 토지는 어디까지나 토지 소유주의 권한이 인정되었으며, 관련 법이나 제도는 오스만 제국의 것을 따랐습니다. 이러한 티마르 제도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비용을 절감하면서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유럽인들은 이를 보고 오스만의 술탄은 국고에서 한푼도 안 들이고 대군을 끌어올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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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마르 제도의 관리

이 티마르 제도는 '무라트 1세' 통치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양쪽 모두에서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티마르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였는데, 오스만 제국은 약 20년에 한번씩 세세하게 조사하여, 각 티마르의 수입과 귀속되는 토지의 소유주, 주민 구성들을 확인하고, 그 내용에 따라 의무지어지는 병사의 숫자나 장비 등을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티마르의 사파히 기병들은 다시 오스만 제국의 행정제도에 따라 배치되어있는 지휘관들 밑에 배속되어 참전하였습니다. '바예지드 2세' 때에는 아예 제국 전역의 티마르 관리에 대한 법령이 정해져, 지위에 따라 얻을 수 있는 티마르를 구분하였으며, 티마르를 얻을 수 있는 자격도 상당히 꼼꼼하게 따졌습니다. 이 티마르는 상속되기도 하였는데, 이 상속에도 기준이 있어 상속자의 티마르 소유 자격이 필요하였으며, 소유한 티마르 전체가 일률적으로 상속되지도 않았고, 항상 같은 토지의 티마르가 상속되지도 않았습니다.

티마르 제도의 붕괴

티마르 제도는 오스만 제국의 초기에는 매우 잘 기능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17세기 무렵부터 인구의 증가와 경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화폐가치 하락, 그리고 군대의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티마르 제도는 유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경제 위기와 기근 등으로 토지 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낮아져, 티마르로 지급될 수 있는 토지 자체가 줄어들었고, 부정부패가 늘어나면서 뇌물이나 인맥에 의해 자격없는 자들에게 티마르가 지급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총으로 무장한 예니체리 보병이 전쟁의 주요 전력으로 대두되면서, 상대적으로 쓸모없어진데다 동원력도 떨어진 시파히 기병을 계속 유지시키기 어려웠고, 오스만 제국 정부는 결국 티마르를 회수하여 국가 세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습니다. 티마르 제도는 1631년 '무라드 4세'가 개혁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19세기 중반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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