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을 지탱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제도 「데브시르메」
- 역사
- 2023. 6. 6.
술탄의 노예 카프쿨루
오스만 제국에는 술탄 '바예지드 1세' 치하에서 일종의 노예로 구성된 수행원을 두는 제도가 있었는데, '카프쿨루'(Kapıkulu Ocağı)라고 불렀다. 이 노예들은 전쟁포로나 국가에 이해 구매된 노예들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술탄이 시종같은 역할들을 하였는데, '무라트 1세'때에 와서 다른 세력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한체 술탄에게만 충성하는 군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들을 이용해 군대를 편성하였다. 이렇게 편성된 술탄의 직속 부대는 기병대로 구성된 '카프쿨루 스파히'와 보병 중심의 '예니체리'로 불리웠다. 초기에 이들은 계속해서 노예로 인원이 충원되었지만, 머지않아 '데브시르메'라는 새로운 차출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데브시르메
데브시르메는 '아동할당세' 혹은 '혈통세'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그리스어로는 '페도마조마'(아이 모으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8 ~ 10세에 해당하는 남자아이들을 국가에서 강제로 징집하였는데, 이러한 징집제도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고, 이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 일도 있었다. 실제로는 징집에 상당히 제약이 많이 있었는데, 먼저 이슬람교 신자는 제외되었으며,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인, 집시 등도 제외되었다고 한다. 또 기혼자이거나, 수염이 없거나, 대머리, 오스만 투르크어를 할 수 있거나, 장인이나 상인의 자녀거나, 고아나 외아들인 경우, 그리고 대도시에 거주하는 자도 제외되었다. 이러한 제한들은 데브시르메를 통해 선발된 자들이 특정한 계층과 결합되지 않을 수 있도록 경계하고, 기술이나 사업 등 경제에 큰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한 이유들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주로 발칸 반도 지역의 기독교 가정에서 선발되게 되었다. 이러한 징집은 주로 4 ~ 5년에 한번 시행되었는데, 징집을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전문 징집관들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이 징집관들은 마을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나이나 체격 등을 확인하고 총명한 아이들을 골라내어 수도로 데려갔다. 징집된 아이들은 상당히 가혹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슬람으로 개종되었다. 초기에 이러한 데브시르메 방식을 거친 아이들은 주로 예니체리에 배속되었으나, 이후 계속 확장되어 '무라트 2세' 통치 시기에는 관료들을 선발하는데도 이용되었다.
중앙집권화와 튀르크계 귀족들에 대한 견제
이러한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의해 선발된 이들은 서류상으로는 술탄의 노예 신분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이 제도를 이용하여 튀르크계 귀족들의 간섭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메흐메트 2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들어나게 되는데, 메흐메트 2세는 튀르크계 출신의 재상을 처형하고, 처음으로 데브시르메로 징집되었던 '자아노스 파샤'를 후임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부터 데브시르메를 통해 진출한 관료나 예니체리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오스만 제국의 발전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술탄은 데브시르메 출신자들만 우대한 것은 아니었고, 튀르크계 귀족들도 존중하면서 두 세력이 서로 경쟁하도록하여, 궁극적으로 제국의 발전을 도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데브시르메 제도의 몰락
그러나 데브시르메 제도의 목적이나 효용을 떠나서, 아이를 빼앗아가는 이러한 제도에 대해 반발이 계속되었는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조혼을 시키거나 거세를 시키기도 하였고, 징집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아예 징집되기 전에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또 이와 정반대의 일도 일어났는데, 데브시르메를 통해 고위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기도 했기 때문에, 일부가정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선발시키기 위해 징집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외아들인 가정에서는 양자를 들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기회를 원천적으로 얻지 못하는 무슬림들의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중에 오스만 제국의 군사 편제 변화 등의 이유에 따라 기존의 데브시르메의 방식만으로는 징집인원을 충족할 수 없었고,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도 징집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과거의 엄격한 방식의 교육과 훈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또 이러한 방식 때문에 데브시르메를 통해 징집된 인원들의 질적하락이 심해지기도 했다. 데브시르메를 통해 공직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인원이 늘어나면서, 이들 자체가 세력화 되는 문제도 발생하였다. 결국 1632년에 예니체리가 '무라트 4세'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후 데브시르메를 통한 예니체리의 징집이 중단되었다. 데브시르메 제도 자체는 그 후로도 계속 유지되었지만, 그 규모가 계속해서 줄어들었고, '아흐메트 3세' 때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데브시르메 제도는 차출과 훈련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제도였지만, 그 과정을 통과한 이들이 오스만 제국의 발전을 지탱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평가되기도 한다. 또 중동과 유럽에 걸쳐있었던 오스만 제국에서 여러민족 출신자들이 고위관료에까지 오를 수 있는 발판이 되었기 때문에, 민족간의 융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튀르크계 귀족들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생겨난 제도가 나아가서 스스로 하나의 세력이되어 버리면서 몰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