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오다가의 쌍벽 「니와 나가히데」
- 역사
- 2023. 6. 4.
노부나가의 일등공신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는 1535년 '니와 나가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와의 집안은 본래 '시바'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시바 가문의 힘이 줄고 '오다' 가문이 득세하면서, 1550년부터 나가히데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가 1552년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멍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노부나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일부 가신들이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유키'를 앞세워 반목하였다. 그러나 나가히데는 이 시기에도 노부나가의 편에서 섬겼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히데는 노부나가보다 1살 어렸는데, 15세 무렵부터 측근으로 섬겼기 때문에, 오다 가문의 주요 전투에도 대체로 참전하였다. 노부나가와 노부유키의 형제 싸움에서도 노부나가 밑에서 참전하였으며, 이후 벌어진 '이마가와'와의 싸움에도 참전하였다. 노부나가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장함에 따라 잇따라 전투가 벌어졌는데, 미노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사이토 타츠오키'와의 전투에도 참전하였고, 계속해서 '롯카쿠'가와의 싸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미노와성'의 공격을 담당하였다. 1570년에 쿄토를 목표로 하던 노부나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연합군과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사쿠라 요시카케'의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아네가와 전투'가 유명한데, 나가히데는 이때 '사와야마성'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고, 성을 지키고 있던 '이소노 카즈마사'를 설득시켜 항복시킨 공으로 사와산 5만석을 받았다고 한다. 1573년에는 노부나가로부터 '와카사국'을 받아 지배하였는데, 이러한 포상은 노부나가의 부하들 중에서도 처음있었던 일로, 당시 오다 가문 안에서 나가히데의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576년에는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즈치성'을 쌓는 등 군사적 재능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재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문무겸비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노부나가의 부하들 중에서 '시바타 카츠이에'와 함께 '오다가의 쌍벽'이라고도 불리운다.
혼노지의 변
일본 열도를 뒤흔든 노부나가였지만, 1582년 교토의 '혼노지'에서 부하였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나가히데는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노부타카'를 보좌하여 시코쿠 정벌에 나가있었다. 노부나가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나가히데는 히데요시와 합류하였고,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승리하였다. 이후 남은 노부나가의 부하들은 전후처리를 하기 위해 '키요스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사실상 실권자였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손자인 당시 3살이었던 '오다 히데노부'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이때 나가히데는 히데요시를 지지하였으며, 사실상 이때부터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에 반발한 노부타카와 카츠이에와의 '시즈가타케 전투', '오다 노부카츠'와 이에야스와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하였고, 그 공으로 카츠이에의 영지였던 '에치젠'과 '기타노쇼 성' 등을 받아 123만석의 영지를 가진 대 다이묘가 되었다.
사망
나가히데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밑에서 승승장구하였지만, 1585년 51세의 나이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오다 가문을 마음대로 조종하며 권력을 차지한 히데요시에 대한 원망 때문에 히데요시의 소환을 거부하였으며, 반발의 의미로 베를 갈라 자신이 앓고 있던 종양을 꺼내 자결하였고, 유서와 함께 꺼낸 종양을 히데요시에게 보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키요스 회의 때 3살에 불과했던 히데노부를 후계자로 세우는 히데요시를 도운 것을 생각해보면 별로 신빙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번 개명하였는데, 그 중에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한 적이 있었다. 이때 하시바(羽柴) 성은 카츠이에와 나가히데의 성에서 한글자씩 따와서 지었다고 할 정도로, 나가히데는 노부나가의 부하들 중에 확실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아들인 '니와 나가시게'는 히데요시의 미움을 사서 119만석의 영지를 몰수 당했으며, 이후 일본 열도를 놓고 벌어진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서군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영지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이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큰 영향력이 없었던 니와 가문은 크게 처벌받거나 하지 않았고, 이후에 다시 공을 세워 10만석 영지를 얻는 등 다른 가문들처럼 아예 대가 끊어지거나 하지 않고, 1860년경에도 나름대로 준수한 수준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