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네번째 군주 「바예지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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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신속 과감한 번개

'바예지드 1세'는 1354년경 오스만의 수도 '부르사'에서 '무라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었을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볐는데,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바예지드 1세는 신속하고 과감한 용병술을 구사하여, 번개라는 뜻의 '이을드름'(Yıldırım)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1389년 오스만군과 세르비아군이 맞붙은 '코소보 전투'의 승리 직후 무라트 1세가 세르비아 귀족에게 암살당하였는데, 당시 무라트 1세를 수행하고 있던 바예지드 1세는 함께 참전하였던 동생 '야쿱'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막사로 불러내었다. 아직 무라트 1세가 암살당한 사실을 몰고 있던 야쿱은 순순히 부름에 응하였고, 야쿱이 막사에 들어서는 순간 바예지드 1세에게 살해당하였다. 비정한 결단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에서 후계자 계승 때마다 자주 일어나게 되는 형제간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한 바예지드 1세는 순조롭게 권력을 승계 할 수 있었고, 그로인해 온존할 수 있었던 오스만의 국력을 영토를 확장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 할 수 있었다. 이때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오스만 술탄국과 경쟁하고 있었던 카라만 후국의 '알렛딘'이 무라트 1세가 사망한 틈을 타고 침략하였기 때문에, 바예지드 1세는 일단 아나톨리아로 복귀할 수 밖에 없었고, 그의 복귀를 안 카라만군은 다시 물러났다고 한다.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정복

1390년 바예지드 1세는 발칸 반도를 정복하기 전에 먼저 아나톨리아 반도를 정리하여 후환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튀르키계 국가들은 같은 이슬람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침략에 대한 명분도 부족하고, 군대의 반발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오스만에 복속되어있던 비잔티움 제국이나, 세르비아 제국의 기독교 국가들의 군대를 동원하였다. 바예지드 1세는 국경에 인접한 여러 소규모 제후국들을 정리한 후에 카라만으로 쳐들어가 수도인 '콘야'를 포위하였으나, 여러 후국들이 '부르한 앗 딘'을 중심으로 연대하여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단 협상을 하여 정복을 멈추고 휴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바예지드 1세는 이듬해에 바로 다시 출정하여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후국들을 평정하고, 다시 콘야를 포위하였다. 이에 부르한 앗 딘이 다시 나서서 '크르크딜림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저지하여, 바예지드 1세의 2년에 걸친 아나톨리아 정복 활동은 일단 멈추게 된다. 바예지드 1세는 코소보 전투 이후 적이었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이를 통해 처남이 된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자치를 보장해 주면서 사실상 세르비아를 관리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지역의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저항하였으며, '지기스문트'가 헝가리를 장악하면서, 더 이상 아나톨리아 반도에만 신경쓰고 있을 수 없어졌고, 결국 1393년 아나톨리아 북부 '아마시아'에서 인근 튀르크계 영주들의 봉신 서약을 받는 것으로 타협하여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예지트 1세는 대군을 편성하여 장남 '쉴레이만 첼레비'를 지휘관으로 불가리아를 공격하게 하여 수도 '터르노보'를 점령하였고, 이후 '니코폴리스'까지 점령하여 완전히 복속시켰으며, 반항적인 주민들이나 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다. 1394년에는 '왈라키아 공국'과 마찰을 빚었는데, 오스만군은 한때 왈라키아의 '미르체아 1세'를 몰아내고, 왈라키아를 복속시켰지만 이후 오스만군이 물러나자, 헝가리의 개입으로 왈라키아는 다시 독립하게 되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의 '마누일 2세'는 인질로 오스만에 체제하고 있었는데, 1391년 '요안니스 5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여 후계자로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바예지트는 자신에게 허락받지 않은 이런 움직임에 분노하였고, 비잔티움 제국을 포위하기 위해 1394년 테살로니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 인근에 많은 성채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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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폴리스 전투

이러한 오스만의 서진은 유럽의 여러국가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에 따라 교호아 '보니파시오 9세'는 십자군을 선포하게 되었고, 비잔티움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을 구원한다는 명목하에 유럽 각국의 군대가 모이게 된다. 헝가리 왕국을 중심으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왈라키아 공국, 폴란드 왕국, 잉글랜드 등 소위 '니코폴리스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군대가 결성되었으며, 1396년 오스만의 영향하에 있었던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로 쳐들어갔다. 당시 바예지드 1세의 오스만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니코폴리스를 손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위하였는데, 사실 십자군은 여러 군대가 모인 만큼 지휘체계가 확립되어있지 않았고, 또 공성무기 또한 준비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성전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지체되고 있었다. 결국 오스만군이 니코폴리스에 당도하였고, 십자군과 오스만 정예군과의 '니코폴리스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십자군은 격파되어 물러나게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할때까지 제대로 된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오스만군 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바예지드 1세가 분노하여 포로들을 처형하였다고 한다. 이후 바예지드 1세는 남은 불가리아 영토를 전부 정복하였고,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사이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바예지드 1세의 부제를 틈타 다시 카라만의 공격이 몇차례 계속되었다.

티무르 제국과 앙카라 전투

1398년 바예지드 1세는 다시 아나톨리아로 돌아와 카라만 후국을 공격하였다. 오스만군은 콘야를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오스만을 괴롭힌 알렛딘을 처형하였으며, 항복한 알렛딘의 두 아들은 포로로 '부르사'로 이송되었다. 바예지드 1세는 이어서 아나톨리아 정복 활동을 계속하였고, 부르한 앗 딘이 사망하자, 그의 영토로 손에 넣었다. 오스만 술탄국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다뉴브 강에 닿았고,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에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이러한 급속한 영토 확장으로 동쪽에서 '티무르 제국'과 만나게 되었고, 오스만 술탄국의 압력에 많은 동 아나톨리아 제후들이 티무르 제국을 의지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 베그 구르카니'는 몽골의 후예인 자신들이 아나톨리아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바예지드 1세에게 정복한 모든 튀르크계 공국을 다시 재건시키라고 요구하였다. 당연하게도 바예지드 1세는 이러한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었고, 1400년 티무르 제국이 본격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로 침공하였다. 그러나 이때 오스만군은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군대는 격돌하지 않았다. 티무르는 남쪽으로 진로를 바꿨고, 1401년에는 바그다드를 정렴하였다. 바예지드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위해 한동안 티무르의 군대를 견제하기만 하였지만, 재차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오자 마음을 바꿨다. 1402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를 풀고, 부르사에서 대군을 모아 진군하였다. 이후 벌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대패하였고, 바예지드 1세는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게 된다.

오스만 술탄국의 분열

앙카라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 지역은 티무르에 의해 석권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스만 술탄국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았고, 선언한 대로 아나톨리아 지역의 튀르크계 제후국들을 재건시켜주고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사마르칸트로 돌아갔다. 바예지드 1세는 포로로 잡힌 이후에 처자식까지 끌려오자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티무르는 바예지드 1세를 정중하게 대우했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학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예지드 1세는 이듬해 감옥에서 사망하였는데, 패배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에 병을 얻어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자결했다고 하기도 한다. 번개의 별명에 걸맞는 정복왕이었지만, 결국 말년에 한번의 패배로 얻은 영토를 거의 대부분 잃게 되었다. 바예지드 1세의 사후 오스만 술탄국의 영토는 아들들이 나누어 가졌는데, 장남인 쉴레이만은 발칸 반도 지역을 차지하였고, 차남인 '이사'가 부르사를 중심으로 기존의 오스만의 영토를 관리하였으며, 사남인 '메흐메트'가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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