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세번째 군주 「무라트 1세」
- 역사
- 2023. 5. 31.
발칸 반도의 정복자
'무라트 1세'는 1326년에 오스만 베이국의 군주인 '오르한'과 아내 '닐뤼페르 하툰'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무라트 1세의 어머니 닐뤼페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노예 출신이며, 기독교 신자였다고도 한다. 아버지 오르한은 1359년경 사망하였는데, 유능한 장군이자 유력한 후계자였던 '쉴레이만'이 오르한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후계자 계승을 두고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무라트 1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6세'의 딸인 '테오도라 칸타쿠지니'의 아들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 싸움은 수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무라트 1세가 오스만 베이국의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싸움에 대해서는 현대에도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 권력을 잡은 무라트 1세는 1360년과 1362년 두번에 걸쳐서 '하드리아노폴리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하드리아노폴리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사이의 통로가 되는 위치에 있는 주요거점으로, 1369년 무라트 1세는 도시의 이름을 '에디르네'로 개명하고, 오스만 베이국의 '제2의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무라트 1세는 수도인 '부르사'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주변 튀르크계 국가들과 경쟁을 계속하면서, 에디르네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로의 확장정책을 추진하였다. 무라트 1세는 직접 아나톨리아 지역의 튀르크계 국가들을 병합하거나 종속시키면서, 동시에 부하 지휘관들을 보내 혼란한 상황의 발칸 반도를 평정하도록 하였다. 당시 발칸 반도에는 비잔티움 제국과 함께 '세르비아 제국'과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 있었는데, 세 나라 모두 오스만과의 싸움에 만전을 기할 수 있을 정도로 내부상황이 정돈되지 못한 상태였다. 1371년 '마리차 강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에디르네로 진군하고 있던 세르비아군을 기습하여 섬멸하였다. 게다가 이 해에 세르비아 황제 '스테판 우로시 5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제국이 사분오열되어 오스만 베이국의 발칸 반도 진출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잇따른 내전으로 완전히 피폐되어 몰락하는 중이었는데, 결국 오스만 베이국의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매년 조공을 받쳐야 했으며, 무라트 1세가 직접 친정에 나설 경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나 황족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해야 했다. 이 와중에도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내전이 일어나서 서로 무라트 1세를 찾아가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불가리아 제국도 이렇게 오스만 베이국이 발칸 반도에서 차츰차츰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에도 자신들끼리 내전이 한창이었다. 한쪽 세력이 오스만 베이국에게 공격당하는 동안에도 다른 세력은 수수방관하였고, 결국 1373년경 종속 될 때까지도 도와주지 않았다. 1380년경에 다시 오스만군이 불가리아 제국을 쳐들어갔고, 후에 오스만 베이국의 손에 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한번 완전히 붕괴됬던 세르비아 제국은 지방 유력자였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아래에서 다시 결속되기 시작하였고, 오스만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면서 차츰 재기를 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술탄과 예니체리
무라트 1세는 단순히 정복사업만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 오르한에 이어서 오스만 베이국의 국가제도가 성립되는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먼저 재상의 숫자를 늘리고, 챤다르 가문의 '챤다르 카라 할릴 하이레딘 파샤'를 대재상으로 하여 국정을 돕도록하였다. 또 예니체리 부대를 창설하여 왕권 강화를 꾀했으며, 사법대신인 '카자스케르',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데프테르다르', 총사령관인 '베일러베이' 등 여러 직책을 만들어, 정부조직을 구성하여 국가 행정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통치를 원할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칸 반도를 '에얄레트'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하였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최상위 행정단위가 되어 1867년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고 한다. 국가의 기틀을 잡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에 걸친 영토를 확립한 무라트 1세는 1383년 스스로 '술탄'을 칭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을 발 아래두고 불가리아 제국과 세르비아 제국을 평정한 무라트 1세는 명실공히 오스만 베이국을 제국의 반열에 올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업적을 남긴 무라트 1세는 오스만의 두번째 창건자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코소보 전투와 죽음
1389년 오스만 술탄국의 무라트 1세는 두 아들인 '바예지트'와 '야쿱'을 이끌고 세르비아로 원정을 시작하였다. 오스만군은 세르비아의 라자르가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는데, 오늘날 코소보의 수도인 프리슈티나 북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1차 코소보 전투'에서 무라트 1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승리했지만, 양측 모두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투가 끝난 후 세르비아의 귀족 '밀로슈 오블리치'가 탈영병을 가장하여 무라트 1세를 알현하였는데, 무라트 1세는 그의 독 묻은 단검에 찔려 사망하였다고 한다. 혹은 전사하였다고도 하고, 포로를 면담하였다가 암살 당했다는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밀로슈 오블리치는 무라트 1세 암살 직후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세르비아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이후부터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사람을 만날 때 시종에게 양손을 붙잡게 한다는 관례가 생겼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무라트 1세가 사망할때 아들 바예지트가 수행하고 있었는데, 바예지트는 무라트 1세가 암살당하자 무라트 1세의 이름으로 야쿱을 막사로 불렀고, 야쿱이 막사로 들어서는 순간 살해하였다. 그리고 바예지트가 오스만 술탄국을 이어받게 된다. 암살당한 무라트 1세는 내장은 코소보 평원에 묻혔고, 나머지 부분은 수도인 부르사에 뭍혔는데, 코소보의 무라트 1세의 무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이슬람교의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