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다섯번째 군주 「메흐메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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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공위시대

'메흐메트 1세'는 1379년경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99년에 '아마시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현직에서 공무 수행의 경험을 쌓으며, 이른바 후계자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402년 오스만 술탄국과 티무르 제국이 충돌하였는데, 바예지드 1세는 다섯명의 아들을 대동하고,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러나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대패하였으며, 장남인 '쉴레이만'과 차남 '이사', 사남 '메흐메트 1세'는 탈출 할 수 있었지만, 바예지드 1세 본인과 삼남 '무스타파'와 막내 '무사'는 티무르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 패배로 인해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당부분에서 '티무르 베그 구르카니'에 의해 튀르크계 제후국들이 재건되었으며, 발칸 반도 지역인 '루멜리아'의 속국들에 대한 장악력도 상당부분 상실하였다. 그리고 군주를 잃은 오스만 술탄국은 탈출에 성공한 형제들에 의해 분열되게 되었다. 메흐메트 1세는 앙카라의 전장에서 탈출할 때, 그가 통치하였던 아마시아 출신의 알바니아계 인물인 '바예지트 파샤'의 도움을 받았는데, 바예지트와 함께 아마시아로 향해 아나톨리아 동부를 손에 넣었다. 쉴레이만은 재상이었던 '챤다르 알리 파샤'와 함께 에디르네로 넘어가 루멜리아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술탄을 자칭하고 비잔티움 제국과 해안지역 영토를 넘기는 대가로 동맹을 맺었다. 무사는 이듬해 바예지드 1세가 포로 생활 중 사망하면서 풀려났는데, 수도 부르사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내 이사의 공격을 받아 쫒겨나 게르미얀 공국으로 도망쳐 망명하였다. 이렇게 메흐메트 1세와 쉴레이만, 이사는 오스만 술탄국을 3분하여, 발칸 반도 지역과 서 아나톨리아, 동 아나톨리아 지역을 서로 장악하고 대결하였고, 아직 포로로 잡혀있던 무스타파만 형제간의 싸움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오스만의 재통일

가장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상당히 안정적인 영역에 있던 쉴레이만이 아닌, 쉴레이만과 메흐메트 1세의 영역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이사였다. 1403년 메흐메트 1세는 이사에게 아나톨리아 반도 영역을 둘로 나누어 통치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이사는 이 요청을 거부하고 형인 자신에게 즉시 항복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 답변을 들은 메흐메트 1세는 그대로 이사의 영역을 공격하였고, 이어진 두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배한 이사는 부르사를 탈출하여 쉴레이만에게 의탁하였다. 이 과정에서 메흐메트 1세는 티무르 제국에 협조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티무르는 메흐메트 1세를 정식 술탄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쉴레이만은 이사에게 군대를 주어 메흐메트 1세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사는 1406년까지 메흐메트 1세를 공격하였지만, 부르사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패배하여 '카라만 후국'으로 망명하였지만, 거기서 메흐메트 1세가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또 이시기 즈음 티무르가 사망하면서 무스타파가 티무르 제국에서 해방된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쉴레이만이 직접 움직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 서남쪽으로 상륙하였으며, 근처의 튀르크계 제후국들을 점령하면서 진격하여, 부르사를 점령하고 앙카라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주변 제후국들은 이런 쉴레이만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메흐메트 1세에게 합류하였고, 진출한 영역을 전부 장악할 역량이 안되었던 쉴레이만은 다시 부르사로 회군하였다. 이러한 소강상태는 1410년경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번에는 메흐메트 1세가 동생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메흐메트 1세는 게르미얀 공국에 망명하고 있던 무사를 불러들여 동맹을 맺고, 군대를 주어 루멜리아로 넘어가서, 인접국인 세르비아와 '왈라키아 공국'의 도움을 얻어 뒤를 치도록 하였다. 쉴레이만은 어쩔 수 없이 아나톨리아 지역을 포기하고 다시 에디르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코스미디온 전투'에서 쉴레이만은 무사의 군대를 물리쳤지만, 무사는 저항을 계속하면서 게릴라 방식으로 전술을 변경하였다. 이런 혼란이 계속되는 사이 쉴레이만은 지지를 계속 잃어갔고, 결국 1411년 무사는 에디르네에 입성할 수 있었으며, 쉴레이만은 비잔티움 제국으로 도망쳐 망명을 시도하였지만, 도중에 살해당하였다. 하지만 내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사는 자신이 장악한 루멜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쉴레이만의 동맹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이에 비잔티움 제국은 메흐메트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오스만 술탄국의 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서로 공격과 수비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1412년까지 두번에 걸친 싸움에서 메흐메트 1세가 모두 패배하자, 메흐메트 1세는 공격의 방향을 바꾸기로 하였다. 메흐메트 1세는 세르비아와 '둘카디르 공국' 등의 협력을 얻어냈고, 무사의 부하들과 접촉하여 이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공작을 기반으로 메흐메트 1세는 1413년 '차무를루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무사는 전투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로서 1402년경에 시작된 오스만 술탄국의 '공위시대'는 막을 내리고 메흐메트 1세가 단독 통치자로서 술탄의 자리를 공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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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1세의 통치와 반란

내전을 종식시킨 메흐메트 1세는 그동안 자신을 보좌해 온 바예지트를 재상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비 튀르크인 중에 최초로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수도인 부르사가 아닌 루멜리아의 에디르네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부터 술탄이 에디르네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후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고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주변국들과는 상당히 온건한 분위기로 대하였다. 비잔티움 제국과는 우호조약을 수립하였으며, 세르비아는 종속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 왈라키아 공국도 정복을 포기하고 신하국으로서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아나톨리아에서도 이러한 기조가 계속되었고, 티무르에 의해 재건되었던 튀르크계 제후국들은 한동안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형제가 남아있었는데, 1416년 티무르에서 풀려나있던 무스타파가 군대를 이끌고 에디르네에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비잔티움 제국과 왈라키아 공국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나라를 나누어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메흐메트 1세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군대를 보냈으며, 무스타파는 패배하여 테살로니키로 망명했다가, 메흐메트 1세와 비잔티움 제국의 협상에 따라 렘노스 섬으로 추방되었다. 또 이 해에 '셰이크 베드렛딘'이 반란을 일으켰다. 셰이크 베드렛딘은 무슬림 아버지와 기독교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나서 두 종교에 모두 영향을 받았는데, 그 이후로도 종교학을 연구하면서 이슬람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베드렛딘은 이러한 사상을 설파하면서 많은 지지자들이 생겼는데,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주장에 영지를 잃은 귀족들 이나 차별받던 기독교도들 등이 모여들었고, 대규모 민란에 가까운 이 반란은 진압하는데 4년이나 걸려 1420년에야 겨우 해결되었다고 한다.

사망과 후계자

1421년 한때 붕괴될 수도 있었던 오스만 술탄국을 잘 추스르고 내전을 이겨낸 메흐메트 1세는 사망하게 되었다. 그는 사망 직전에 재상 바예지트를 불러서,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아마시아 총독으로 파견되었있던 아들 '무라트 2세'를 에디르네로 부르게 하였다. 무라트 2세가 에디르네에 도착한 뒤에야 메흐메트 1세의 죽음이 공표되었으며, 별탈없이 술탄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선택한 것은 메흐베트 1세 본인이 심각한 형제간의 내전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직까지도 오스만 술탄국의 국내외의 혼란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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