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여섯번째 군주 「무라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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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두 무스타파와의 싸움

'무라트 2세'는 1404년 '메흐메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라트 2세는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을 사실상 종식시키고 오스만 술탄국의 단독 통치자가 된 1413년에 아버지처럼 '아마시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9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후계자 교육의 일환으로 공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421년에 메흐메트 1세는 사망하면서 측근에게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아마시아에 있는 무라트 2세를 수도 '에디르네'로 급히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메흐메트 1세의 죽음은 무라트 2세가 에디르네에 도착할때까지 비밀에 부쳐졌으며, 에디르네에 도착한 무라트 2세는 무난하게 권력을 승계할 수 있었다. 사실 메흐메트 1세는 무라트 2세가 동생들과 영토를 나누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무라트 2세는 이런 유언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고도 한다. 메흐메트 1세는 본인이 형제들과 권력을 둘러싸고 긴 내전을 겪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언을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가 죽을때까지도 내전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술탄이었던 메흐메트 1세가 죽고, 17세의 젊은 무라트 2세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자, 이를 기회라고 여긴 비잔티움 제국이 끼어들기 시작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메흐메트 1세가 형인 '무스타파 첼레비'와 내전에서 승리하였을때, 무스타파 첼레비가 도주하여 망명하였었는데, 메흐메트 1세는 이때 비잔티움 제국과 협정을 맺어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그 대가로 무스타파 첼레비를 배제하도록 요청하였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메흐메트 1세가 죽자 협정을 깨고 무스타파 첼레비를 풀어주었으며, 그를 술탄으로 내세워 오스만 술탄국에 간섭하려는 의도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무라트 2세는 어린 나이에 비해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은데, 그는 무스타파 첼레비를 체포하여 처형시켰고,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이 무스타파 첼레비의 정체에 대해서는 주장이 나뉘는데, 오스만측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 내세운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비잔티움 제국은 수도가 함락될 위기에 쳐했지만, 1422년 무라트 2세는 오스만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협상을 맺고서는 군을 물렸다. 이 조약으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매년 오스만 술탄국에 공물을 보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동생인 '무스타파'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포위를 풀고 군을 물렸다고도 한다. 동생 무스타파의 반란은 1423년에 진압되었고, 다른 두 동생들을 장님을 만들어서 술탄 후보에서 완전히 배제시킨 이후에 무라트 2세는 자신의 권력을 완전히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무라트 2세가 눈감아 준것은 콘스탄티노플 뿐이었고, 테살로니키는 계속해서 공격하였는데, 계속 유지할 여력이 없었던 비잔티움 제국은 1423년 아예 테살로니키의 소유권을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오스만 술탄국에는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베네치아 공화국의 항의도 따로 없었던 것인지 포위는 1430년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술탄국에게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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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위

내부의 문제를 어느정도 정리한 무라트 2세는 다시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영향력을 늘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티무르 제국'에 의해 재건되었던 튀르크계 제후국들을 다시 하나하나 정복하여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1439년에는 발칸 반도로 방향을 돌려 '세르비아 공국'을 정복하기도 하였지만, 1441년 이러한 오스만 술탄국의 재흥에 위협을 느낀 주변 국가들이 협력하여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무라트 2세는 아나톨리아에서 '카라만 공국'의 침입을 격퇴하였지만, 헝가리와 폴란드의 연합군에게 연패하여 1444년에 세르비아 공국이 재건되었고, 많은 영토를 다시 빼앗기고, 10년간 발칸반도에서 전쟁을 하지않을 것을 조건으로하는 조약에 승인하였다. 이러한 조약은 오스만이 건국된 이후로 가장 굴욕적인 조약이었고, 무라트 2세는 이러한 패배의 책임을 진다는 명목으로 술탄직에서 은퇴하여, 당시 12살에 불과했던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물려주었으며, 자신은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600년의 오스만 제국 역사에서 이렇게 은퇴한 술탄은 무라트 2세 뿐이다. 무라트 2세가 은퇴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형들이 죽어서 갑자기 후계자가 된 메흐메트 2세를 안정적인 후계자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기도 하고, 오스만 술탄국을 강력히 견제하는 주변국들의 눈을 돌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기회라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는데, 당시 교황이었던 '에우제니오 4세'는 이교도와 맺은 약속은 깨뜨려도 죄가 되지 않는다며 주변국들에게 오스만 술탄국을 침략하도록 선동하여, 추기경 '체자레니'를 중심으로하여 대오스만 동맹이 결성되었고,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 부르고뉴, 베네치아 등이 참여한 이 연합군을 '바르나 십자군'이라고도 부른다. 그러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라트 2세가 다시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고, 메흐메트 2세도 무라트 2세에게 편지를 보내서 술탄으로 복귀하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결국 무라트 2세가 다시 복귀하여 오스만군을 지휘하였고, 연합군과의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무라트 2세는 1446년에 다시 술탄으로 복위하여 오스만을 다스렸다.

무라트 2세의 죽음

1448년에는 다시 헝가리와 왈라키아 공국의 연합군이 세르비아를 통해 쳐들어왔는데, 무라트 2세는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후 1450년에는 알바니아 지역의 저항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엊지 못하였고, 1451년 사망하면서 다시 메흐메트 2세가 술탄이 되었다. 무라트 2세는 본래 '예니체리'를 선발하기 위해 시행되던 '데브시르메' 제도를 이용하여 관료들도 선발하는 등 관료들의 전문성을 함양하고, 술탄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예니체리의 제식 무기를 정식으로 총으로 변경하는 등 군대의 현대화도 시작하여, 이때부터 소형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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