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두번째 군주 「오르한」
- 역사
- 2023. 5. 29.
오스만 베이국의 새 수도
흔히 '오르한 가지'라고 불리우는 오르한은 1281년경 오스만 베이국의 수도였던 '쇠위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299년 아버지인 '오스만 1세'가 독립국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오스만 베이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오스만 베이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비티니아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1326년에 오스만의 군대는 오르한의 지휘아래 '부르사'를 함락시켰다. 이 시기 오스만 1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오르한이 오스만 베이국을 물려받게 되었다. 오르한에게는 '알라앗딘'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형제간이 사이가 돈독했기 때문에 본래는 튀르크족의 전통에 따라 나라를 나누어 갖자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알라앗딘은 이 권유를 거절하고 함께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고 하였고, 이에 오르한은 동생을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혹은 알라앗딘이 나라를 오르한에게 맡기고 자신은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동로마 제국에 따르면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오르한이 오스만 1세의 사망 전에 이미 오스만 베이국을 계승했다는 설도 있고, 오스만 1세의 사망 시기 자체가 부르사의 점령 전인지, 후인지에 대한 내용도 엇갈리고 있다. 어찌되었든 오르한은 본래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던 부르사를 점령하였으며, 점령한 부르사를 오스만 베이국의 새 수도로 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세력권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1331년에는 '니케아 공의회'로 유명한 '니케아'를 점령하였으며, 1337년에는 한때 로마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기도 했던 '니코메디아'를 점령하였다.
챤다르 가문
오르한이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오스만 베이국의 튀르크족들은 기존의 유목형태의 생활에서 본격적으로 도시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스만 베이국의 영토가 점점 넓어짐에 따라 통치를 도와줄 인물이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오스만 1세와 관계가 깊은 에데바리를 통해 고명한 '울라마'(학자)인 '챤다르 가문'을 소개 받아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은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오스만 왕가를 제외하고는 별도의 귀족 가문은 없었는데, 챤다르 가문은 예외적으로 왕가의 신뢰를 받으며,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며 막대한 부를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움을 바탕으로 오르한은 이슬람 범에 따라 제도를 정비하고, '메드레사'(대학)을 창설해 교육제도를 확립하는 등 오스만 베이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오스만 제국의 독자적 화폐인 '아쿠체 은화'를 처음 주조한 것도 이 시기였다고 한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1340년경 비잔티움 제국은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내전이 한창이었는데, 이 내전은 장장 6년 동안 지속되면서 제국을 황폐화 시켰다. 결국 '요안네스 6세'는 내전을 끝내기 위해 오스만 베이국의 오르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오르한의 도움을 받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 대가로 오르한은 요안네스 6세의 딸 '테오도라'와 혼인하여, 두 국가 사이에 사실상 혼인 동맹이 결성되었다. 든든한 동맹을 얻은 오스만 베이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다른 튀르크계 국가들을 평정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고, 1354년 발칸 반도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포리스'까지 점령하였다. 이 때부터 아들인 '쉴레이만'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이후 본격적으로 발칸 반도에서 세력확장을 시작하였고, '세르비아 왕국'을 물리친 적이 있는 오스만 베이국은 순조롭게 발칸 반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장남 쉴레이만은 1357년에 사망하였는데, 매사냥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였다고 알려져있지만,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후 1359년경에 오르한도 사망하였고, 오스만 베이국은 '무라트 1세'가 계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