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의 탄생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세계가 생기기 이전에는 '카오스' 였다고 한다. 그런 카오스에서 생겨난 것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이다. 이후 가이아가 스스로 '우라노스'를 낳았고, 다시 우라노스와의 사이에서 계속 아이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라노는 가이아가 '키클롭스', '헤카톤케이르' 같은 괴물들을 낳는 것을 보고, 아이들을 지하 '타르타로스'에 감금하였다. 이에 분노한 가이아는 자식인 '크로노스'와 함께 우라노스를 몰아내었고, 크로노스는 남매인 '레아'와 결혼한다. 크로노스와 결혼한 레아도 자식들을 낳았는데, 가이아에게 우라노스처럼 크로노스 자신도 자식들에 의해 쫓겨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낳을 때마다 모두 삼켜버렸다. 그러자 레아는 가이아에게 부탁하여 새로 태어난 '..
고대 시대의 계급 갈등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 사회는 그 능력에 따라 구성원의 역할을 분배하였고,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고착화되어 특정 이익을 독점하기 위한 계급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선사시대에는 족장이나 전사장, 제사장 같은 것들이었고, 중세에는 귀족과 신관 계급이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명확한 구분선은 없으나 가진 권력이나 부, 명예 같은 것들을 척도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고대 로마 공화국에서는 귀족계급인 '파트리키'와 평민계급인 '플레브스'간의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고대 로마도 그리스도 중세시대처럼 명확하게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뉜 건은 아니고, 말하자면 사회 선도계층과 사회 구성계층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귀족계층이 정치결정을 진행하는 '원로원'이나 '아레이오스 파..
귀족과 평민 간의 계급갈등 로마는 기본적으로 귀족이 정치를 행사하는 귀족정이다. 왕정과 공화정, 이후 제정으로 정치형태가 변화하기는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로마 '원로원'은 존재하였고, 그 정치적 목소리를 내었다. 고대 사회는 대체로 귀족을 비롯한 부유한 자가 평민을 대표로 하는 빈자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로마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계급 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착취가 가속화됨으로 인해 늘 계급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고, 각 사회는 이를 해결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런 사회갈등의 압력이 누적되어 폭발하게 되면 대체로 내부 혹은 외부로 압력을 분출하게 되는데,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거나, 혹은 내부에서 폭발함으로 인해 폭동이나 혁명 같은 사회개혁을..
프라이토르 '프라이토르'(법무관)은 초기 로마 공화정에서 최고위 직책이었으나, '집정관' 제도가 도입되면서 두 번째 직책이 되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법적 판결권을 가지고 재판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치안권이 있어 군사적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임기는 1년으로 집정관의 부재 시에는 집정관의 역할을 대신하였다고도 한다. 최초에 1명이었지만 로마의 세력권이 늘어남에 따라 8명, 16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이후 황제가 집권하고 로마 제정으로 변하면서 명예직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아이딜리스 '아이딜리스'는 '안찰관' 혹은 '조영관' 이라고 하는데 평민을 대표하는 '아이딜리스 플레비스' 2명과 귀족을 대표하는 '아이딜리스 쿠룰리스' 2명을 뽑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원래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는 '케..
로마의 한시적 최고 권력자 고대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했을 때 통상 한 사람의 왕이 가졌던 권한을 2명의 '집정관'에게 위임하였다. 집정관의 임기는 1년으로, 그 임명은 '민회'에서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권력을 배분하여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정책을 시행하는 데에 있어 집정관 간의 합의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시행 속도가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는 평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로마에 위기가 닥치면 상당한 위험요소로 작동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에는 '독재관'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두게 된다. 독재관은 통상 두 사람의 집정관 중 한 명이 취임하게 되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만큼 군사적, 정치적 결정에 대해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독재..
권력의 집중화를 견제한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의 공화정에서 로마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왕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그대로 집정관이 행사했다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로마 군단은 기본적으로 집정관만이 소집하여 지휘할 수 있었고, 로마의 재정을 관리하고 각종 정책을 시행하였다. 집정관의 임기는 1년으로, 매년 2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였으며, 각 집정관은 상호 합의하에 업무를 진행하였다. 이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왕과 같은 권력을 같게 되거나, 직접 왕이 되려는 행위를 견제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로마는 아이러니하게도 왕정 시절부터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하고, 또 그 권력을 혈연에 따라 세습하는 행위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로마의 특성은 폭군 이후 ..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의 제정의 배경 로마 공화정은 귀족인 '파트리키'와 평민인 '플레브스'로 구성된 계급 사회였다. 파트리키는 초기 로마 왕정 때부터 로마에 있던 사람들이나 이후 로마에 복속된 도시국가들의 유력 귀족들이 속한 것으로 보이고, 플레브스는 주로 로마와의 전쟁에서 항복하거나 패배하여 로마로 유입된 거주민들이었던 것 같다. 이 두 계급의 역할 분리는 뚜렷했는데, 로마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집정관'(콘술) 등의 공직에 있거나 '원로원'에 진출하여 정치활동을 하는 등의 행위는 귀족인 파트리키에게만 허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세력권이 커지는 만큼 플레브스들의 숫자도 역할도 늘어나면서, 불만도 따라서 차츰 늘어나게 되었다. 로마에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결정을 하기 위한 회의인 '쿠리아 민회'와 ..
십이표법이 제정된 배경 '십이표법'이 제정된 것은 기원전 450년 경이라고 하며, 그 무렵의 로마는 '플레브스'라고 불리우는 평민계층과 '파트리키'라고 불리는 귀족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의 법은 최고제사장과 귀족 계급만 알 수 있었는데, 계급에 따라 결혼을 금지하거나, 투표권을 차별하는 등 계층갈등이 표면화되면서 평민들도 법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법전의 편찬을 요구했다. 귀족들은 이런 요구를 오랫동안 묵살하였지만, 결국 원로원이 법전 편찬 요구를 수용하면서 10명을 대표로 뽑아 입법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당시 아테나이에서는 '솔론의 개혁' 시행됐을 시기로, 지중해 근방은 고대 그리스에서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로마에서도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에 시찰단을 보내서 그 제도를 배워 ..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정치가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히며, 연설을 매우 잘해서 웅변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아테나이의 유력한 귀족가문 출신으로, 그 또한 상당한 영향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에 아테나이를 이끌었으며 아테나이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페리클레스는 정치적으로 평민들을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으며, 그에 맞서 귀족들을 위해 정치를 시행한 '키몬'과는 라이벌 적인 존재로 대립하거나 협력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국가 재정을 이용하여 빈민들에게 극장을 무료로 개방하거나, 특정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등의 정책을 ..
로마의 독재관 카밀루스 로마는 공화정 시절 2명의 집정관과 원로원이 협의하여 운영하였다. 이렇듯 정치권력을 소수의 여럿이 시행하는 과두정의 형태였는데, 이는 왕정 시설처럼 한 명의 권력자가 왕이 되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급박한 경우에는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위기시에는 '딕타토르'라고 하는 독재관을 두어 전권을 위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재관은 두 명의 집정관 중에 한 명으로 결정하였는데 역시 과도한 권력이 장기적으로 한 명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기는 6개월로 짧게 하였다. '마르쿠스 프리우스 카밀루스'는 이런 독재관에 5번이나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카밀루스의 뛰어난 능력의 반증과 동시에 공화국 초기의 로마가 얼마나 많은 위협에 노출되었었는..
클레이스테네스 '클레이스테네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정치가이다. 그는 아테나이의 귀족가문인 알크마이온 가문 출신의 귀족이었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 휘하의 참주정에도 '아르콘'으로 당선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연설을 통해 권력(크라토스)이 민중(데모스)에게 있어야 한다며 민주주의(데모크라토스)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귀족과 부유층들에게 적대시되었다. 당시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스파르타'의 도움을 얻어 당시 '참주'였던 '히피아스'를 쫓아낸다. 그러나 이미 상당히 정치에 참여하고 있던 민중들은 과거 귀족정으로의 회귀를 거부하였고, 그들에게 포위당한 아테나이 귀족과 스파르타는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그리하여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
페이시스트라토스 아래에서 발전한 아테나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리스의 폴리스 '아테나이'의 '참주'로 2대에 걸쳐 아테나이를 이끌었다. 참주를 나타내는 그리스어는 'tyrannos'로 영어로 하면 'tyrant'(폭군)이 되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학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을 말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기에 참주는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이시스트라토스 아래에서 아테나이는 크게 발전하게 된다. 그가 참주가 된 것은 기원전 561년으로, '솔론의 개혁'의 약 30년 후 정도가 된다. 이 무렵 아테나이는 솔론의 개혁 덕분에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지만, 여전히 서로 다른 계층사이에서의 분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는 귀족과 부유층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