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의 최고 통치자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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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

권력의 집중화를 견제한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의 공화정에서 로마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왕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그대로 집정관이 행사했다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로마 군단은 기본적으로 집정관만이 소집하여 지휘할 수 있었고, 로마의 재정을 관리하고 각종 정책을 시행하였다. 집정관의 임기는 1년으로, 매년 2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였으며, 각 집정관은 상호 합의하에 업무를 진행하였다. 이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왕과 같은 권력을 같게 되거나, 직접 왕이 되려는 행위를 견제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로마는 아이러니하게도 왕정 시절부터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하고, 또 그 권력을 혈연에 따라 세습하는 행위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로마의 특성은 폭군 이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면서 더 공공연하게 표출하게 된다. 집정관은 '켄투리아 민회'에서 선출되었으며 재임도 허용되었다. 기원전 300년경에 연임 금지 규정이 생겼는데, 기본적으로 로마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규정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로마의 위기시기 등 그게 어려운 경우 아주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이런 태도는 집정관을 선출하는데도 작용하여 상황에 따라 규정에 관계없이 선출되거나 활동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민회에서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집정관은 로마에서 아주 명예로운 직책으로 그 경험은 정치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원로원 진출의 수단에도 이용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귀족 출신자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공화정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귀족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기원전 450년에 나온 '십이표법'의 제정으로 평민의 공직 진출이 허가되고,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되면서 두 명의 집정관 중에 한 명은 평민출신으로 선출하게 바뀌면서, 계급 격차가 줄어들고 시민정치로 한걸음 다가가게 된다. 집정관은 민회나 원로원을 소집하여 정책을 결정하기 위한 표결을 요구하거나 정책을 시행하면서, 동시에 로마 군단을 소집하여 로마 밖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해야 했기 때문에, 1명의 집정관이 원정을 나가고, 나머지 1명이 내정을 책임지며 로마를 수호하는 등 역할 분담을 했다. 그러나 때에 따라 로마에 위기가 닥쳤을 경우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효율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집정관 중에 '독재관'을 임명하기도 했다. 한 명의 집정관이 독재관으로 임명되면 자동적으로 다른 한 집정관은 그의 밑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로 조정되어,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였으나, 한 사람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것에 심한 반감이 있었던 로마 답게, 그 임기를 6개월로 제한하여 독재관이 왕이 되거나, 혹은 '참주'같은 위치에 서는 것을 방지하였다. 독재관은 라틴어로 'dictator'이여 영어 'dictator'(독재자)의 어원이기도 하다. 참고로 집정관 주위에는 '릭토르'라고 하는 '파스케스'라는 무기를 든 12명의 무장한 자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들은 집정관을 호위하는 것이 주 임무이며, 이는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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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과 아르콘의 차이

고대 로마 공화정에 집정관이 있는 것 처럼, 고대 그리스에는 '아르콘'이 '폴리스'를 이끌어 나갔다. 그리스는 도시국가인 폴리스에 따라 그 법이나 정책이 조금씩 서로 다른데, 로마의 집정관이나 그리스의 아르콘이나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어 내정이나 군사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행사한 것은 흡사하다. 그러나 그 정치체제에 따라 집정관과 아르콘의 위치는 조금 다른데, 예를 들면 아테나이의 아르콘은 초기에는 9명, 이후에는 10명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법이나 속도에 차이가 있었다. 로마 공화정은 흔히 과두정이라고도 부르는데 두 집정관이 필요한 정책을 절차에 따라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승인받아서 시행하였는데, 사실상 공화정이 끝날 때까지 귀족정에 가까웠던 로마에서는 집정관의 정치적 위상이 높고, 그만큼 큰 정치적 영향력과 발언권을 가졌다. 아르콘이 정책을 집행할 때는 로마의 원로원과 흡사한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승인받는게 아니라 '에클레시아'(민회)에서 모든 시민들이 투표를 거쳐 승인되었는데, 민주정이었던 그리스의 아르콘은 가진 정치적 영향력과 발언권만큼이나 시민들을 설득시키는 과정이 중요하였다. 기본적으로는 당시 고대 그리스의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로마의 집정관 제도는 그리스의 제도를 흡사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민주정이었던 그리스와 과두정이었던 로마의 정치 체제의 차이만큼 그들의 정치적 위치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전직 집정관 제도

집정관 임기를 마치게 되면 '프로콘술'(proconsul)이라는 전직 집정관이 되었다.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만이 로마 속주의 '총독'이 될 수 있었으며, 로마가 필요로할 때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요구받았다. 로마는 그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시 전투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임기가 1년인 집정관이 로마 군단을 이끌게 되면 도중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전직 집정관이라는 직책을 두어 필요할 때에 따라 유연하게 집정관을 대신하여 공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후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하면서 모든 권한은 '황제'에게 일임되었고, 집정관은 칭호에 가까운 형태로 로마 공화정의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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