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어원이 되는 고대 로마의 「독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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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로마의 한시적 최고 권력자

고대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했을 때 통상 한 사람의 왕이 가졌던 권한을 2명의 '집정관'에게 위임하였다. 집정관의 임기는 1년으로, 그 임명은 '민회'에서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권력을 배분하여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정책을 시행하는 데에 있어 집정관 간의 합의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시행 속도가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는 평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로마에 위기가 닥치면 상당한 위험요소로 작동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에는 '독재관'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두게 된다. 독재관은 통상 두 사람의 집정관 중 한 명이 취임하게 되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만큼 군사적, 정치적 결정에 대해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독재관이 왕, 또는 그에 준하는 일인 권력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 임기를 6개월로 하였다. 비상시에 로마를 일치단결 시켜 위험에 대응하면서도, 동시에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쥐는 것에 끊임없이 견제하는, 실로 로마다운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재관은 임명되면 15만의 상비군과 15만이 예비병을 포함한 30만의 로마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임페라토르'(최고 사령관)였으며, 집정관은 그 지휘하에 들어갔고, '호민관'조차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는데, 이후 임페라토르는 'Empire'(제국)나 'Emperor'(황제)의 어원이 되었다.

로마의 독재관

로마 최초의 독재관은 기원전 501년에 집정관으로 취임한 '티투스 라르티우스 루푸스'로 로마 주변의 '사비니족'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선출되었다. 전쟁은 선포되었으나 실제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독재관 임기가 끝나기 전에 사임함으로 독재관의 역할에 대한 전례를 남기었다. 공화정 초기의 로마는 주변 세력과 많은 분쟁이 있었고, 그에 따라 독재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나게 되었다. 기원전 369년에 '에트루리아'와의 갈등에서 '마르쿠스 프리우스 카밀루스' 처음으로 독재관이 되어, 그 후 갈리아 지방의 '갈리아족', 로마 남부의 '라틴족' 등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총 5번이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 독재관은 보좌역으로 '마기스테르 에퀴툼'(기병장관)을 임명할 수 있었는데, 카밀루스는 평민 출신을 임명함으로 평민의 지위가 올라가, 이후 평민들이 정치적 권한을 요구하는 방향의 정책을 요구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에서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120년간 독재관을 임명하지 않을 정도의 세력권을 갖게 되었다. 이런 로마가 원하는 독재관의 전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인데,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농사를 짓다가, 원로원의 요청으로 독재관에 취임하여 적을 무찌르고, 취임한 지 16일 만에 사임하였다고 한다.

종신 독재관

다만 이런 독재관은 이후에 변질되게 되었는데, 바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종신독재관'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된다. 술라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이라는 명분으로 임기가 없는 종신독재관에 취임한다. 비록 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이후 사임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로마에서 종신 독재 정치가 가능해지는 선례를 만들게 되었다. 이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승리하고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였는데, 왕이 되려고 한다는 의심을 품은 정적들에게 암살되었다. 그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독재관제도는 폐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공화정이 몰락하고 제정으로 이행하면서 실질적으로 독재관이 임명될 일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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