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평민의 수호자 「호민관」
- 역사
- 2022. 12. 28.
귀족과 평민 간의 계급갈등
로마는 기본적으로 귀족이 정치를 행사하는 귀족정이다. 왕정과 공화정, 이후 제정으로 정치형태가 변화하기는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로마 '원로원'은 존재하였고, 그 정치적 목소리를 내었다. 고대 사회는 대체로 귀족을 비롯한 부유한 자가 평민을 대표로 하는 빈자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로마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계급 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착취가 가속화됨으로 인해 늘 계급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고, 각 사회는 이를 해결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런 사회갈등의 압력이 누적되어 폭발하게 되면 대체로 내부 혹은 외부로 압력을 분출하게 되는데,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거나, 혹은 내부에서 폭발함으로 인해 폭동이나 혁명 같은 사회개혁을 통해 나라가 사라지곤 했다. 이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 사회와 로마 사회의 해결책은 다른 사회와는 달랐는데, 바로 평민계급에게 정치참여 환경을 개방하여 스스로 개선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 사회는 민주제를 실시하여 평민의 정치참여를 완전하게 해방한 데에 반해, 로마는 정치참여 환경을 개선하기는 하였지만, 계속 귀족계급이 정치 전반을 이끌어나갔다.
평민 중에서 선발되는 호민관
공화정 초기까지의 로마에서는 공직은 '파트리키'라고 불리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경우에 따라 '플레브스'라고 불리는 평민들이 공직을 역임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정관을 뽑는 '켄투리아 민회'에서도 참여는 가능했으나 그 지위나 재산에 따라 영향력이 달랐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나 로마의 모든 부분에서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하는 원로원의 구성원이 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 중 피해에 대한 보상이나 공유 토지의 분배 등으로 평민계층에게 불만이 축적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494년 '성산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무시하는 귀족계층과 원로원에 반발하여 로마 밖에 있는 '몬테 사크로'에 모여서 일종의 집단 파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로마에서 평민들의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먼저 당장의 불편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하여 '십이표법'이 재정되었으며, 평민들의 사회적 불만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평민들만의 민회인 '플레브스 민회'가 생겼고, 플레브스 민회에서 '트리부누스 플레비스'(호민관)를 선출하여 평민들을 수호하고 대변하게 하였다. 이후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으로 평민들도 공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호민관의 거부권
호민관은 오직 평민 계급에서만 선출 될 수 있었는데, 이는 평민들의 요구를 대변하고 권리를 옹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자신을 의지하는 모든 평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밤낮으로 자기 집 문을 열어 놓고 도시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했다. 이런 호민관이 견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호민관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의도적으로 호민관의 임무를 방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민관의 권한은 로마시에서만 효력이 있었고, 속주에는 구속력이 없었다. 또 평민들의 중범죄를 보호하는데 권한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런 호민관이 가장 강력한 권한은 바로 'Veto'(거부권)이었다. 호민관은 민회를 열고 독점적으로 법률을 발의할 수 있었으며, 원로원을 소집하여 청원할 권리도 있었다. 이렇게 다른 호민관의 결정이나, 집행관의 결정에 대해 반대하여 그 효력을 무효화하거나 내용을 중재할 수 있는 것이 거부권이다. 지금의 '국제연합'(유엔)에서 상임이사국들이 행사하는 거부권이 여기에서 왔다고 한다. 다만 이 거부권은 '독재관'에게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로마의 흐름과 호민관
호민관은 초기에 2명이 임명되었으나 로마의 확장에 따라 10명까지 늘어났다. 기원전 367년 로마의 공직이 평민들에게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을 만든 것도, 당시 호민관이었던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의 공적이었다. 기원전 287년 제정된 '호르텐시우스법'에서는 플레브스 민회에서 의결된 사항에 대한 원로원 인준절차를 폐지함으로, 호민관들의 입법활동이 완전히 보장되게 되었다. 기원전 123년 당시 호민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 강력한 권한을 이용해 급진적인 토지개혁이나 사회개혁을 추진하였고 보수적인 귀족의 반대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하고 사망하였다. 기원전 81년에 로마의 종신독재관으로 취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호민관의 입법권과 거부권 등 특권을 대폭 축소하였으나, 이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적이 몰락하고 제정으로 이행하면서 호민관이 가지고 있던 많은 특권들은 '황제'가 가져가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직책 자체는 존속시켰으나, 이후 '알렉산데스 세베루스' 황제 때에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로마가 융성하게 된대에는 일인독재에 대한 견제와 능력 숭상 주의,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이 문화에도 유연한 대처 등의 여러 이유들을 들기도 하는데, 호민관 제도 같은 계급갈등을 완하고 귀족과 평민을 떠나 '로마 시민'으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