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국의 계급 갈등을 종식시킨 「호르텐시우스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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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로마노

고대 시대의 계급 갈등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 사회는 그 능력에 따라 구성원의 역할을 분배하였고,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고착화되어 특정 이익을 독점하기 위한 계급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선사시대에는 족장이나 전사장, 제사장 같은 것들이었고, 중세에는 귀족과 신관 계급이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명확한 구분선은 없으나 가진 권력이나 부, 명예 같은 것들을 척도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고대 로마 공화국에서는 귀족계급인 '파트리키'와 평민계급인 '플레브스'간의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고대 로마도 그리스도 중세시대처럼 명확하게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뉜 건은 아니고, 말하자면 사회 선도계층과 사회 구성계층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귀족계층이 정치결정을 진행하는 '원로원'이나 '아레이오스 파고스'같은 기구를 장악하고, 그 구성원을 독점하면서 그에 따른 이익을 얻은 것은 맞으나, 일방적으로 평민을 착취하고 자유를 제한한 중세와는 다르게, 평민계급도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되었다. 당시에도 '노예제도'가 있었음에도 당시의 노예는 '아프리카 노예'로 대표되는 노예와 다르게 주로 '전쟁 노예'였으며, 일정 기간을 채우거나 일정 금액을 납부하는 등의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조건에 따라 하루아침에도 내가 이웃집 사람의 노예가 될 수 있었던 고대와 노예사냥을 통해 잡혀와서 철저하게 상품으로 관리되어 다른 인종들에게 착취당한 아프리카 노예를 동일선상에서 평가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에는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로 구성되는 계급 간의 차이는 있어도 서로를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귀족계급과 평민계급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여러 노력들이 있었고, 완전한 평등사회라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 불만이 상당히 완화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솔론의 개혁'을 시작으로 '클레이테네스'와 '페리클레스'같은 사람들에 의해 민주정이 완성되었고,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는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 '호르텐시우스법' 등이 제정되어 갈등을 조절하게 된다.

호르텐시우스법의 제정

기원전 287년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당시 독재관이었던 '퀸투스 호르텐시우스'에 의해 제정된 '호르텐시우스법'의 내용은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이 원로원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다는 단 하나뿐이다. 이미 기존에 '플레브스 민회'를 통해 '호민관'이 선출되고,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을 통해 평민들도 공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면서 많은 차이가 해소되었지만, 평민들이 만든 법을 귀족들이 평가하여 승인한다는 마지막 쐐기돌마져 이 법을 통해 빠지게 된다. 이를 통해 사실상 평민과 귀족의 정치적 계급의 차이가 로마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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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귀족계급의 평민에 대한 연민이나 평민계급의 정치적 투쟁 만으로 해소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로마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활발하게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 전후로 많은 다른 세력과 맞부딪치게 된다. 이 시기 로마 공화국은 '삼니움족'과 갈등을 빚는 등 다수의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그로 인해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귀족들이 주로 맡는 '기마병'의 역할보다 다수의 시민 군단에 의한 중장보병 '호플리테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로마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귀족들이 평민 위에 군림하면서 이익을 독점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많은 국가나 사회가 이러한 점을 간과하여 붕괴되곤 하는 일이 역사에 빈번하지만, 로마는 계급갈등을 이겨내고 그 명맥을 더 이어나가게 된다.

호르텐시우스 법이 낳은 새로운 계급

로마와 그리스는 이미 지중해를 중심으로하는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발전하는 도시만큼 증가하는 인구와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많은 물자는 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주었다. 계급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더 이상 귀족의 혈통이 독점적 지휘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재산가들이 득세하게 된다. 당시는 상당히 새롭고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제도였지만, 그만큼 정치적 중립성이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정지척인 인지도와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유명한 공적을 이룩하여 로마의 주인공이 되거나 많은 재산을 이용하여 이름을 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상황과 더불어 로마에서는 '호민관'이라는 특권적 지휘에 오를 수 있었던 평민계급이 아이러니하게도 귀족보다 더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곧 로마에서는 귀족계층과 평민계층이 섞인 형태의 재산가인 '노빌레스'라는 계급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귀족의 인맥과 평민으로서의 호민관 특권, 그리고 재산을 이용하여 빠르게 로마의 실권을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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