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두번째 아버지 「카밀루스」
- 역사
- 2022. 12. 24.
로마의 독재관 카밀루스
로마는 공화정 시절 2명의 집정관과 원로원이 협의하여 운영하였다. 이렇듯 정치권력을 소수의 여럿이 시행하는 과두정의 형태였는데, 이는 왕정 시설처럼 한 명의 권력자가 왕이 되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급박한 경우에는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위기시에는 '딕타토르'라고 하는 독재관을 두어 전권을 위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재관은 두 명의 집정관 중에 한 명으로 결정하였는데 역시 과도한 권력이 장기적으로 한 명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기는 6개월로 짧게 하였다. '마르쿠스 프리우스 카밀루스'는 이런 독재관에 5번이나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카밀루스의 뛰어난 능력의 반증과 동시에 공화국 초기의 로마가 얼마나 많은 위협에 노출되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가문은 본디 로마 밖의 라틴족 도시에 살았으나 로마로 귀순하여 당시에는 로마의 귀족으로 주요한 공직을 맡고 있었다. 카밀루스는 일찍부터 로마군에 입대하여 공직에 종사하며 그 경력을 쌓았다. 기원전 406년 로마는 북쪽의 에트루리아족의 도시 '베이이'에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그곳은 오래된 도시로 세력이 강력하여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기원전 396년 로마는 베이이와의 전쟁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했는데, 이에 카밀루스는 첫 번째로 독재관에 지명되었다. 그는 장장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그 무공을 자랑할 수 있는 화려한 개선식을 허락받았다. 에트루리아는 로마보다 오래된 국가로 베이이도 당시의 로마에 피해 도시로서 우수하였는데, 로마의 평민들은 베이이를 로마의 제2도시로 하여 로마 시민의 절반을 이주할 것을 요구하였다. 카밀루스는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한 위업에 비해 인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외에도 전쟁의 전리품 분배 문제 등으로 인하여 고발당하였다. 카밀루스는 정치적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끼고 가족들과 함께 로마를 떠나게 된다. 로마 시민들은 그가 로마를 떠났음에도 재판을 진행하여 벌금을 부과하였는데, 이를 보면 그는 상당한 미움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갈리아인의 침공과 로마 점령
'갈리아'는 현재의 프랑스 지역을 부르는 말로 당시 갈리아인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현재는 켈트인으로 불리는 갈리아인은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당시 갈리아족은 많은 종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세노네스족의 족장 '브렌누스'가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하여 에트루리아 지역의 도시 '클루시움'를 공격하였다. 클루시움의 요청을 받은 로마에서 사절을 보내 싸움을 중재하였는데, 로마의 사절단 중 한 명이 그의 심기를 건드려 클루시움의 포위를 풀고 로마로 진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벌어진 기원전 390년 로마의 북쪽 알리아 강변에서 일어난 '알리아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는 그대로 점령되기에 이른다. 로마 시내는 갈리아인에 의해 점령되었고 로마시의 일부였던 '카피톨리움' 언덕만은 로마인들이 사수하여 위로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아래로 로마가 직접 외적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두 번째는 800년 후의 서기 410년 '서고트족'에 의해서다. 당시 '아르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카밀루스는 갈리아인 일부가 아르다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시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였다. 카밀루스는 갈리아의 약탈부대와 싸워 승리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로마시민과 패잔병 등이 합류하여 그 규모는 12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카밀루스는 포위된 로마로 전령을 보내 원로원에 연락을 취했고, 원로원은 카밀루스는 독재관으로 삼아 1년간 로마의 이름으로 갈리아인과 싸울 수 있게 하였다. 이 시기 로마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였고, 이로 인해 점령을 지속하기 어려워진 브렌누스는 로마와 협상하기로 하였다. 브렌누스는 협상장에서 승자로서 패자인 로마에게 가혹한 요구조건을 제시했으나, 이때 카밀루스가 로마에 도착하여 브렌누스와 싸우게 된다. 카밀루스는 갈리아군을 크게 격파했고, 이에 로마인들은 카밀루스를 로마의 2번째 아버지라는 의미로 '제2의 로물루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카밀루스는 생애 두 번째 독재관으로 임명되며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의 침략한 갈리아인에 의해 로마의 도시 많은 부분이 부서졌고 각종 기록들이 손실되어서, 이 시기 이전의 역사를 자세히 알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계속되는 로마의 위기
이후 로마의 도시는 재건하였지만, 로마의 세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한 주변 세력들의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볼스키', '아이퀴'가 로마를 공격하고 로마의 일부 라틴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에트루리아인들에게 공격당하면서, 카밀루스는 또다시 독재관에 임명된다. 이 후로도 계속되는 침략과 반란에 카밀루스는 은퇴할 때까지 로마의 영웅으로서 로마의 부름에 응답하여 생애 총 5번이나 독재관에 취임하며 로마를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