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나이 민주정을 완성한 「페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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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정치가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히며, 연설을 매우 잘해서 웅변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아테나이의 유력한 귀족가문 출신으로, 그 또한 상당한 영향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에 아테나이를 이끌었으며 아테나이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페리클레스는 정치적으로 평민들을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으며, 그에 맞서 귀족들을 위해 정치를 시행한 '키몬'과는 라이벌 적인 존재로 대립하거나 협력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국가 재정을 이용하여 빈민들에게 극장을 무료로 개방하거나, 특정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대중영합주의'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페리클레스의 업적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계속되는 평민 계급의 정치력 영향력 확대에 더해,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나이는 육군 중심의 국가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해상무역 국가로 성장하였는데, 이에 따라 당시 주로 선박의 노젓는 위치를 담당하였던 무산 계급의 권리가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당시 아테나이의 정치는 사실상 민중파가 득세하나 귀족들도 과거부터 있었던 제도들을 이용하여 계속 민중파를 견제하였다. 이에 기원전 461년경 민중파의 '에피알테스'는 전통적으로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권한을 사법 처리에 국한하여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에클레시아'(민회)에서 강력한 반대 없이 채택되었다. 민회의 구성은 소수 귀족에 비해 앞도적인 다수의 평민층이 장악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이로서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이 민회에서 이루어지게 되면서, 소위 민심을 얻는 자가 정책의 결정권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페리클레스는 귀족파의 주요 인사였던 '키몬'을 도편추방제를 이용하여 아테나이에서 축출하였다. 그는 '아르콘' 선출을 위한 재산 기준을 낮추었으며, 무산계급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고, 일부 주요 직책을 제외한 공직 및 500인회도 추첨제로 결정하도록 하는 등 아테나이의 시민이면 누구나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치 참여 기회를 확대하였다. 이로서 모든 자격이 되는 아테나이의 시민들이 참정권을 갖게 되는, 직접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르콘, 법정 배심원 등에게 수당을 지급하거나, 파르테논 신전을 짓는 등의 정책은, 국가 재정을 이용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는 데 사용하였다고 비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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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스 동맹과 아테나이의 횡포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재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기원전 477년에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여러 '폴리스'가 맺은 군사 동맹이다.  동맹국은 의무적으로 군사적 지원이나 재정적 지원을 해야 했으며, 동맹의 명칭 대로 '에게해' 중앙에 있는 델로스섬에 동맹 금고를 두었다. 기원전 453년경 아테나이는 동맹의 금고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금고를 아테나이로 옮기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아테나이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동맹의 맹주에서 동맹의 지배자가 되기에 이른다. 동맹의 해군력과 운용비용을 실질적으로 모두 손에 넣은 아테나이는 이를 빌미로 동맹내 화폐를 아테나이의 화폐로 통합시키기도 하고,

그 자금을 횡령하여 '프로필라이아'나 '파르테논 신전', '아테나의 황금상' 등을 건설하는데 쓰기도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는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을 맺으면서 아테나이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자, 아테나이의 압박을 받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결국 두 세력은 충돌하여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이 일어나자 아직 추방된지 10년이 되지 않은 키몬을 다시 아테나이로 불러들여 스파르타와 중재하는 역할을 하거나, 아테나이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는 등 아테나이 전체의 이익 앞에서 민중파도 귀족파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쟁 초기에는 '델로스 동맹'의 규모가 더 컸지만, 그동안 아테나이의 행태나 스파르타의 공작 등에 의해, 동맹을 이탈하는 폴리스가 늘어나 결국 전쟁에 패해 스파르타에 그 패권을 넘겨주게 된다.

페리클레스의 죽음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었던 기원전 429년에 아테나이에 창궐한 역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 전염병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먼저 그의 두 아들이 병에 걸려 사망하였고, 이에 실의에 빠진 페리클레스도 같은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페리클레스가 살았던 시기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할만큼 현대의 제도와도 비슷한 문제점들을 보이는데, 바로 수단과 방법을 떠나서 유권자의 다수를 확보하기만 하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 민주정의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연설을 통해 유권자를 선동하고, 금품을 살포하여 지지를 얻으며, 재정을 이용하여 이익을 분배하여 인기를 높이는 등, 현대 시대에도 만연해 있는 정치적 부패의 행태를 잘 보여준다. 이는 그 정치적 의도를 떠나 과연 민주주의가 올바르고 완성된 정치체제 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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