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나이 민주정의 완성 「클레이스테네스」
- 역사
- 2022. 12. 24.
클레이스테네스
'클레이스테네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정치가이다. 그는 아테나이의 귀족가문인 알크마이온 가문 출신의 귀족이었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 휘하의 참주정에도 '아르콘'으로 당선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연설을 통해 권력(크라토스)이 민중(데모스)에게 있어야 한다며 민주주의(데모크라토스)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귀족과 부유층들에게 적대시되었다. 당시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스파르타'의 도움을 얻어 당시 '참주'였던 '히피아스'를 쫓아낸다. 그러나 이미 상당히 정치에 참여하고 있던 민중들은 과거 귀족정으로의 회귀를 거부하였고, 그들에게 포위당한 아테나이 귀족과 스파르타는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그리하여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실시되었고, 아테나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시초가 될 수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참주정이 몰락하고 귀족정으로의 회귀 시도도 실패로 끝나면서 아테나이에 남은 길은 민주정으로 가는 것 뿐이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의 개혁'을 다시 부활시키고 더 강화하였다. 먼저 당시까지 혈연을 기반으로 한 4부족체제로 구성되어 있던 아테나이를 행정지역에 따른 10개의 부족으로 변경하였고, 그에 맞춰 400인회를 500인회로 개편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혈연을 중심으로 뭉쳐있던 귀족들의 권한이 축소되었고, 그때까지 정치참여가 도심지 거주민 위주였던 것에서 각 지역의 민중도 모두 참가할 수 있게 확대되었다. 잘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아테네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이 '개인의 이름+부친의 이름+데모(행정부족)의 이름'으로 변경되면서, 기존의 부족에서 오는 유대감(구권력체계)이 무너지고 새로운 단위로 본래 민중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솔론의 개혁에서 4계급으로 분할하고 있는 재산 기준을 농업 생산량 기준에서 상공업 생산량까지 포함한 기준으로 바꾸어 현실화했다.
또 권한이 축소되고 있던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구성을 기존의 추대제가 아닌 추첨제로 변경하여, 사법기능에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지 않도록 최소화했다. 그동안 귀족들에 의해 뽑혔던 '아르콘'도 9명에서 10명으로 늘리고 민회인 '에클레시아'에서 선출하게 하여 국가 전략을 담당하게 했는데, 이것을 '스트라테고'라고 하며 현재 사용하는 전략(strategy)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국가수반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 최고위 지도자들이 완전히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게 되면서 아테나이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스트라시즘'(도편추방제)를 만들었는데, 이는 참주 같은 현재 아테나이의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인물을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도편추방제는 먼저 추방할 사람이 있는지를 먼저 투표하고, 도자기 파편에 추방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투표한 것으로 '비밀투표'였다. 최소 6000표 이상이 집계되어야 승인되었으며, 추방된 사람은 10년간 아테나이에 들어올 수 없었으나, 오직 추방만 하는 것으로 대상자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아테나이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제한하려는 의도였으나, 이후에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등 변질되게 된다.
클레이스테네스와 솔론의 차이
기본적으로 솔론은 안정과 평등, 그리고 아테나이의 발전을 개혁의 방향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부터 있던 전통적인 정치체제 위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평민들이 정치참여 기회를 확대함으로 격차를 조율하고 불안한 사회구조를 개선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그 새로운 기준을 재산(티모크라티아), 그중에서도 전통적인 농업생산량으로 결정하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한발 더 나아가 귀족과 평민을 섞어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면서 정치참여에 있어서 더 완전한 평등을 목표로 했다. 전통적인 정치체제는 상당히 개편되었으며, 당시 대두되고 있던 상공업을 인정하여 전통적인 농업생산량에 더해 상공업 생산량도 재산 기준에 추가되었다. 무엇보다 정치적 의사결정을 민회에서 시행하게 되면서, 자격이 되는 시민은 누구나 동등하게 정치적 참여권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데모크라티아'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솔론이 더 보수적이었거나, 클레이스테네스가 더 진보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의 개혁이 몇십 년 동안 시행되는 걸 지켜보았고,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도 겪었기 때문에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