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계급사회의 전환점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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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표법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의 제정의 배경

로마 공화정은 귀족인 '파트리키'와 평민인 '플레브스'로 구성된 계급 사회였다. 파트리키는 초기 로마 왕정 때부터 로마에 있던 사람들이나 이후 로마에 복속된 도시국가들의 유력 귀족들이 속한 것으로 보이고, 플레브스는 주로 로마와의 전쟁에서 항복하거나 패배하여 로마로 유입된 거주민들이었던 것 같다. 이 두 계급의 역할 분리는 뚜렷했는데, 로마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집정관'(콘술) 등의 공직에 있거나  '원로원'에 진출하여 정치활동을 하는 등의 행위는 귀족인 파트리키에게만 허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세력권이 커지는 만큼 플레브스들의 숫자도 역할도 늘어나면서, 불만도 따라서 차츰 늘어나게 되었다. 로마에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결정을 하기 위한 회의인 '쿠리아 민회'와 '켄투리아 민회'가 있었다. 쿠리아 민회는 오직 파트리키들만 참여할 수 있었으나 왕정시대 이후 공화정으로 이행하면서 실질적인 기능은 거의 없어졌다. 켄투리아 민회는 전 로마 시민이 참여하는 회의로 입법활동이나, 집정관을 임명하는 등 공직자를 선정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상위 계급에게 더 강한 권한이 있어 가난한 계층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플레브스들은 로마 밖에 있는 '몬테 사크로'에 집결하여 일종의 파업을 하였고,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십이표법'이 재정되고, 플레브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호민관'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탄생한다. 호민관은 기원전 494년 처음 도입되었는데, 오직 평민 계급에서만 선출될 수 있고 평민들의 새로운 민회인 '플레브스 민회'에서 선출하였다. 호민관은 평민들을 대변하여 권리를 옹호하고, 독점적으로 법률을 발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며, 집정관이나 다른 공직자들의 결정이 평민의 권익을 침해할 때 그것을 반대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에 2명이었던 호민관은 로마 시민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후에 10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십이표법이 재정되거나 호민관이 생긴 것은 플레브스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는 있었지만, 계급 간의 격차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 계급과의 갈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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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

기원전 367년에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에 의해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이 제안되었다. 법의 내용은 먼저, '트리부누스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집정무관)을 폐지하고,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반드시 플레브스 중에서 선출되게 한 것이다. 당시 로마는 1년 임기의 2명으로 제한되어 있는 집정관이 아니라, 전투에서의 지휘권관 갖는 집정무관을 새로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었다. 이 집정무관은 집정관이 귀족들만 될 수 있었던 데에 반해 계급에 관계없이 종사할 수 있었으면 매년 4명에서 6명까지 선출되었다. 아마 당시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인원 부족을 메꾸고, 전쟁 수행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신분에 관계없이 임명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정관에 임명되면 임기종료 후 당연직으로 원로원에 소속되면 능력에 따라 다른 공직에 종사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해 평민들의 공직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장기적으로 귀족과 평민의 간격이 줄어들게 되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내용은 공유지를 500유게라(약 125헥타르) 이상 점유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것이었다. 늘어나는 시민 숫자에 비해서 계속 적어지는 공유지를 부유층이 독점할 수 없게 하고, 채무 등으로 생활이 어려운 평민들의 구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마지막으로 채무자가 이미 지출한 이자를 원금에서 공제하고 잔액을 분할 납부 할 수 있게 한 것인데, 고대 그리스에서도 '솔론의 개혁'이 후에 나타나는 일련의 개혁들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가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고리대에 의한 사회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 전체를 위한 발전을 모색하는 로마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당시에는 귀족과 평민으로 계급이 나뉘어 있는 게 당연한 사회였으며, 심지어 '노예제' 또한 당연히 존재하는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위기 때마다 계급이나 재산보다 로마 전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팍스 로마나'를 이룩할 수 있었던 로마의 비결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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