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7현인, 아테나이의 「솔론」
- 역사
- 2022. 12. 23.
솔론
솔론은 기원전 638년경에 태어나 고대 그리스 지역의 아테나이(현재의 아테네)에서 활동한 정치가이자 의원이며 시인이다. 민주적 개혁을 실시했기 때문에 평민계급인 것 같지만 귀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는 민주정치로 유명하지만 당시는 민주정이 실시되기 이전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아테나이 마지막 왕가의 핏줄이라고도 한다. 그는 일련의 개혁을 한 후 아테나이를 떠난다. 그 후는 그리스 각지와 이집트 등을 여행했던 것 같다. 소아시아에 가서 마지막 '리디아'의 왕을 만난 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최후에는 아테나이로 돌아와 친족이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를 포기하는 것도 듣지 못하고, 자신은 키프로스 섬에서 80년의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는 아테나이가 귀족과 평민의 극심한 빈부격차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르콘'으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실시한 개혁을 통해서 사실상 민주주의의 첫발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어, 아테나이의 민주정의 사실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아테나이의 상황
기원전 6세기이 아테나이의 시민은 다수가 부자의 노예나 다름없었는데, 극심한 빈부격차와 고리대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채무에 의해 노예가 되거나 일종의 농노인 '헥테모로스'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고대에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이후 로마 시대는 물론 현재에도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런 채무 노예의 문제점은 이미 존재하는 빈부격차를 더 가속화시킨다는 데에 있는데, 흉년이 들어 채무를 진 시민이 그 채무로 인해서 노예가 되고, 부자는 그 노예를 착취하여 더 큰 부자가 되어 또 다른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사이클이 반복되어, 종국에는 한 줌의 부자가 대다수의 노예를 부리는 구조가 되고, 이윽고 신분 해방을 위한 폭동이나 반란에 의해 끝마치게 된다. 아테나이와 아티카도 다르지 않고 이미 보였다. 극심한 착취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대법에 따라 토지를 균등분배 할 것을 요구하였다.
솔론 개혁과 솔론의 한계
아테나이는 왕이 없는 '폴리스'였다. 이것은 강대한 권력을 가진 왕이 있는 '스파르타'와는 대조적인데, 당시에도 다른 국가들과 확연히 달랐다. 아테나이는 원래는 왕정이었다가 기원전 8세기 무렵에는 왕정은 폐지되고 귀족정이 된다. 임기가 1년인 9명의 '아르콘'이 정치를 하고, '에클레시아'(민회)가 존재는 했지만 그다지 기능하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기원전 7세기로, 시민계급 중에 상공업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재산을 모으면서, 정치적인 발언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따라 에클레시아의 역할이 강화되고, 동시에 귀족계급과 평민계급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시민들은 솔론은 아르콘으로 추대하여 중재를 맡겼다. 귀족들은 같은 귀족인 솔론을 믿었고, 평민들은 솔론의 정의감을 믿었다. 기원전 594년 아르콘으로 취임한 솔론은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기본적으로는 기득권층의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먼저 채무 노예를 해방하고, 그 원인인 채무로 인해 노예가 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그리고 부권을 제한하여 아버지가 아이를 내다 버리거나 팔 지 못하게 하는 등 내용이었다. 그리고 아르콘은 사백인회의 수장으로서 내각을 이끌게 하고 '아레이오스 파고스'(당시 의사당의 역할)는 재판소의 역할로 바꾸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에클레시아가 최종 의사결정권을 갖게 함으로써, 어느 특정계층이 아닌 아테나이를 구성하는 시민 모두에게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솔론은 그저 두 계급 간의 차이를 조정한 것뿐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바야흐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솔론은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인구조사도 실시하였다.그 결과를 바탕으로 시민을 4개의 계급으로 나누었는데, 재산에 따라 'Pentacosiomedimnoi', 'Hippeis', 'Zeugitae', 'Thetes'로 나뉘었다. 정치적으로 완전평등한 것이 아니라 재산에 따른 선거권이 주어지기는 했으나, 당시 출신성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에 따라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티모크라티아'는 파격적인 내용이긴 하였다.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그 개혁 내용이 미묘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아직 민주주의라는게 보편적을 넘어서 존재자체가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계급에 따라 군역을 달리 지었는데, 그것은 그 재산에 따라 짊어져야 하는 의미가 다른 것으로, 계급에 따라 권리가 늘어나는 만큼 의무도 늘어나게 된다.
솔론 개혁의 효과
'솔로니아 헌법'이 효과를 보기도 전에 귀족도 평민도 불만을 표출했다. 이미 두 계층의 갈등은 뿌리 깊고 솔론은 그들을 압도할만한 권력이 있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솔론은 아테나이를 떠났고, 이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되어 아테나이를 다스렸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서서히 그 위력을 발휘하여,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는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통치제도를 갖게 된다. 후대사람들은 자기네 법 전체를 솔론의 공으로 돌릴 정도로 그의 개혁은 효과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