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초기의 인물 「게르마니쿠스」
- 역사
- 2022. 12. 22.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라고 불린 청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 오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후계자 후보들이 잇달아 죽어버리는 불행의 소유자였다.후계자 제1후보였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젊은 나이에 낙마사고로 사망하였으며, 외손자였던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양자로 삼았지만 외국 원정중 전사하게 된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손자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추방되었다. 그런 실의에 쌓여있던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구원은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였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한 '리비아'가 데리고 온 아이였지만, 로마의 명문가인 '클라우디우스'가의 피를 잇고 있었다. 드루수스의 아내는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인 '옥타비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인 '안토니아'. 둘 사이에 태어난 것이 게르마니쿠스였고,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후계자로 결정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를 그의 백부 이자, 고령의 자신을 보좌하고 있던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양자로 입양하도록 요구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이미 50세를 넘기고 있어, 게르마니쿠스에게 그 권력이 이어지도록 하고 있음으로 볼 수 있다.
게르마니쿠스 신화
로마에서 게르마니쿠스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당시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혈연자이기도 했지만, 젊었으며 매우 잘생겼었다고 한다. 서기 11년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게르마니아 평정을 위해 게르만족이 사는 현재의 독일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은 원래 아버지인 드루수스에게 주어진 존칭에서 온 것으로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는 자'라는 의미인데, 마치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것 같이 되었다. 당시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를 평정한 로마는 이후 인접지역인 게르만족이 사는 게르마니아 지역도 평정하여 로마의 영향권을 넓히려고 하였으나, 게르만족이 사는 지역은 당시 빽빽하고 깊은 숲으로 그때까지 많은 로마의 장군들이 함부로 진군하지 못한 매우 위험한 지대였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평정이 로마와 이미 로마화 되고 있는 갈리아 지역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원정을 계속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등이 계속하여 원정에 파견되어 한때 게르마니아는 안정을 찾는 듯하였으나, 게르만족의 로마화에 의한 반발과 게르만인 영웅 '아르미니우스'에 의한 반란으로 인해 평화가 흔들리고 있었다. 게르마니쿠스와 티베리우스는 로마에 협조적인 게르만 부족과 비협조적인 게르만 부족을 분리하고 부분적인 로마화를 가속화시키면서 게르만족의 반발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이후 일시 귀국하여 게르마니쿠스는 정식으로 게르만 원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가 2번째 로마 황제가 된다. 이 사건으로 게르마니아의 로마 주둔군이 티베리우스의 황제 즉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게르마니쿠스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게르마니쿠스 본인은 그러한 행위를 꾸짖으며 게르마니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과 폭동을 진정시켰다. 잇달아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병사들 앞에 서서, '신의에 반하는 정도라면 죽은 것이 낫다'라고 말해 스스로 자해하려고 하여 주위에서 말렸다는 일화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 게르마니아 주둔군은 반란을 그만두고 티베리우스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게르마니쿠스는 상당히 격정적이었던 것 같고, 어느 의미 라틴인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항상 냉정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는 티베리우스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던 것 같다.
게르마니아에서 일어난 폭동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폭동으로 인해 게르마니쿠스는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갈리아로 피신시켰다. 게르마니쿠스에게는 어린 아들인 '가이우스'가 있었는데, 그는 'Caligae'라는 로마 군단병이 신던 가죽신을 신고 아장아장 걸어 다녀서 병사들 사이에서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 칼리가라는 신발 이름에서 '칼리굴라'(꼬마 장화)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바로 3대째 로마 황제가 되는 '가이우스 게르마니쿠스'이다. 이후 로마인인 칼리굴라가 로마인을 피해 갈리아인들이 있는 곳으로 피신하는 모습을 보고 병사들이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만하다.설마 그가 로마 최악의 폭군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르마니쿠스는 훌륭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병력을 모아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에 대한 복수전을 시작했다. 적장인 아르미니우스가 대단히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게르마니아의 지형 때문에 로마군은 상당히 불리한 상태에서 맞서야 해서 정공법으로 공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게르마니쿠스는 공방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게르마니아를 잠식했고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계절이 겨울이 되고 로마에서 원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서가 도착하자, 게르마니쿠스는 반발했지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 철군하면서 사실상 게르만족과의 싸움은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로마에 돌아와 개선식을 한 게르마니쿠스는 많은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그는 게르만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고 과거 로마의 패배를 설욕하면서 로마인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로마 시민들은 이대로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열망하고 있었지만,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의 땅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질투하여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낸다고,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말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당시 로마 시민들은 분명 그러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당시에 전차 경주나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재정 낭비를 중단시키는 정책을 단행했기 때문에, 장기가 계속되면서 결정적인 성과를 내놓지 못하는 해외 원정을 유지시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그의 정책은 동시에 로마 시민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다만 후에 '훈족'에 의해 게르만 대이동이 일어나면서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이 몰락하게 되기 때문에, 만약 이때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원정을 완수하여, 게르마니아가 완전히 로마화 되어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전해지게 되어, 그것은 곧 칼리굴라의 황제 취임과 열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동방파견과 영웅의 마지막
로마의 가장 큰 적은 후에 로마 제국의 몰락의 원인이 되는 게르만족이라고 생각하시 쉽지만, 당시 게르만족은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하지 않은 야만부족이었기 때문에, 게르만이 일으키는 문제는 갈리아 지방에서 약탈이나 반로마 선동정도에 그치는 국지적 소란에 불과했다. 실질적 문제는 오히려 로마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직접 세력권이 맞닿게 되는 동방세력이 문제였다. 중동은 이미 그리스가 유럽에서 가장 전면에 나섰던 '알렉산더 대왕' 당시부터 이미 갈등을 겪어왔으며, 이 시기에는 '파르티아 제국'과 로마 제국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페르시아의 명맥을 이어가는 이 나라는 강대했고, 동방 문제는 항상 로마 제국의 최우선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게르마니쿠스는 로마의 최중요지로 파견되게 된다. 이러한 로마의 중대한 문제에 게르마니쿠스가 개입된다는 것만 해도, 게르마니쿠스가 후계자로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이 동방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아르메니아 왕국'(이하 아르메니아 왕국)이다. 한쪽으로는 로마의 세력권에 접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파르티아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파르티아 제국 사이의 일종의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게르마니쿠스가 동방에 도착했을 때, 아르메니아 왕국은 파르티아 제국과 갈등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현 왕 '보노네스 1세는 원래 파르티아 제국의 황족으로 어렸을때 로마에 인질로 보내져 로마에서 자랐다. 로마에서 고급 교육을 받은 그는 이후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거의 친로마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의 반란으로 축출되고, 이후 로마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었다. 파르티아에서는 반란 이후 '아르타바노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아르바타노스 2세는 자신의 아들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다시 아르메니아를 침략하였고 보노네스 1세의 지원 호소를 받은 로마에서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로마는 파르티아 제국과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아르바타노스 2세의 왕권을 로마가 인정하는 대신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당시 폰토스 왕족 출신인 '아르탁세스 3세'가 취임하는 것으로 파르티아 제국과 협상을 온건히 마치게 된다. 이러한 게르마니쿠스가 진행한 외교적 흐름으로 인해 로마에 대한 파르티아의 적개심을 누그러트리면서 동시에 아르메니아를 계속 친로마 성향의 국가로 남겨둘 수 있게 된다. 게르마니쿠스는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에 체제 하면서 중재하였는데, 시리아 총독이었던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충돌하게 된다. 피소는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와 매우 친하였는데 게르마니쿠스에게 동방 통수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피소를 시리아 총독으로 앉히면서, 피소에게 게르마니쿠스를 보조하면서 견제하도록 한 것 같다. 그러나 피소는 게르마니쿠스의 명령에 사사건건 반발하고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파르티아와의 중재를 성공적으로 마친 게르마니쿠스는 갑자기 고열로 쓰러져 곧 숨을 거두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게르마니쿠스가 피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 중 일부는 티베리우스가 피소에게 명령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피소는 로마로 돌아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로마의 분위기는 그에게 매우 불리하였으나 그는 계속 독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무죄를 주장하며 자해하였고, 사후 항명이나 내란선동에 대해서는 유죄가 내려졌지만, 게르마니쿠스 독살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사건으로부터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무죄, 혹은 유죄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은 베일에 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