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 역사
- 2022. 12. 21.
일반적인 황제의 의미
보통 '황제'라고 하면 제국의 주인, 최고 권력자, 무소불위의 권력, 왕 중의 왕, 국가의 최고 지도자, 왕보다 높은 사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최정점 등의 의미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동양에서는 중화문화권에서 '皇帝'(황제)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서양에서는 국가마다 조금씩 다른데, 영어로는 'Emperor'(엠퍼러), 프랑스어는 'Empereur'(임페리얼)로 라틴어인 'Imperator'(임페라토르)에서 기원하고 있고, 독일어는 'Kaiser'(카이저), 러시아어는 'Царь'(짜르)로 라틴어인 'Caesar'(카이사르)에서 기원하고 있다. 동양에서 쓰는 단어인 황제는 중국의 고대신화에 나오는 '삼황오제'를 그 근원으로 하고 있으며, 서양에서 기원이 되는 임페라토르는 원래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로마군 최고 사령관을 부르는 말로 '최고 명령권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뜻이며,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국 시대의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둘 다 그의 업적과 이후 로마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역사적 영향력에 의해, 그가 카이사르이며 당시 로마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페라토르였기 때문에 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동양 최초의 황제 「시황제」
진의 '시황제'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 31대 왕으로 이름은 '정'이다. 전국을 통일하고 그 왕들을 복종시킨 정은 '王'(왕)의 칭호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는데, 도교에 나오는 '태황'과 '천황', '지황' 등의 칭호를 고민하다가 삼황오제에서 '황'자와 '제'자를 따와 황제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처음 황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황제라 칭했다. 그는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중국대륙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중국이 하나의 나라라고 하는 인식이 뿌리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 그가 사망하고 진나라 무너진 이후에 중국대륙은 몇 번이나 여러 나라로 분열되지만 다시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려는 방향성을 계속 나타내게 된다.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계속의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는데,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푸이)가 퇴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절대적인 전제군주로서의 황제
동양문화권에서 '황제'를 자칭할 수 있는 것은 중화제국의 황제 뿐이다. 실제로 스스로를 '황제'라고 참칭 한 세력은 많이 있었지만, 민중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통성을 나타내던가, 아니면 중국대륙을 제패하여 실력으로 증명해야 했다. 진의 시황제가 황제위를 나타내는 '전국옥새'를 만들어, 일부에서는 그것의 소유로 증명으로 하려고 하였으나, 많은 나라가 나타나고 스러진 중국대륙에서는 '혈통'이나 '정당성'만큼이나 실제적인 '통치'를 그 근간에 두었다.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는 황제가 절대적인 전제군주로서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때에 따라 절대적인 전제군주가 황제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황제는 절대적인 전제군주로서 신하와 국민은 그에게 복종하고, 황제가 결정한 것은 하늘 이외에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서양의 황제는 가장 뛰어난 시민
서양의 황제 개념은 '로마 제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근간은 제국의 기반이 된 '로마 공화정'에서 오는데, 바로 '프린켑스 세나투스'라는 자이다. 이것은 번역하면 원로원의 제일인자가 된다. 로마는 그 시작인 왕국시절부터 구성원 중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권력의 정점인 왕이 되었는데, 이후 로마의 정치체제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원로원'(세나투스)이라고 불리는 의회를 통해서 통치했다. 왕정 때부터 있었던 로마 원로원은 200 의석에서 시작하여 로마가 그 규모를 늘려감에 따라 600석까지 늘어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집정관'이라는 대표자를 복수로 두고, 주요 안건에 대해 회의와 토론을 통해 그 영향력을 행사하여 로마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집정관은 어디까지나 투표로 선출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원로원은 조언을 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의 비상시 '독재관' 한 명의 집정관에게 모든 권한을 일시적으로 위임하는 제도도 있었으나 상설직이 아닌 임시직이었다. 이후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임기가 무제한인 '종신독재관'에 취임하면서 사실상 로마 황제의 견본이 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는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권력을 황제에게 모으고 원로원은 형식적인 형태로 남게 되었다. '카이사르'라는 명칭이 정식적으로 황제를 나타내게 된 것은 3세기 무렵으로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테트라키아'(4두정치)를 시작하면서 '부제'(카이사르)를 표현하는 존칭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인 것 같다. 역대의 로마 황제들은 동양과 달리 '혈연'만으로 계승하거나 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일부는 선출되거나, 찬탈하거나, 추대되기도 하는 등 그 정의가 모호했으며, 그 모태가 되는 공화정 시절의 집정관이나 제국 시절의 황제조차 원로원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프린켑스 세나투스라는 원로원에서 가장 뛰어난 자, 즉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자라는 정체성 이외에는 규정이 희박했다. 로마의 황제는 다른 왕들처럼 왕관 등이 따로 없었고, 대신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제군주와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전제군주로서의 모습보다는 어딘가 행정가 같은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후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하여 '동 로마제국'에서는 7세기까지 '카이사르'의 칭호가 사용되었지만, 이후 그리스어로 '바실레프스'(바실레우스)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서유럽 국가들도 동 로마제국처럼 카이사르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게 되었지만, 9세기 초 '칼 대제'가 '서 로마제국'의 황제로 취임하면서 다시 'Imperator Romanorum'의 칭호가 사용되었다. 이후에도 유럽에서는 로마 제국처럼 넓은 영토를 거느리는 국가가 제국을 자칭하며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거나 하며, '혈연'이나 '정통성'이 황제 취임에 큰 걸림돌이 되거나 하지 않았다.
Imperator를 황제로 번역한 것은 오역
이처럼 동양에 있어서의 「황제」와 서양의 「Imperator」의 개념은 크게 다르다. '나폴레옹'을 「나폴레옹 황제」라고 일반적으로 번역하지만, 프랑스 제국에서 나폴레옹은 「des Français」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직역하면 프랑스의 제일 시민이라고 하는 느낌이 된다. 군과 신, 그리고 민으로 구성되어 각각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완전히 다른 동양에서는 프린켑스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대체할 수 있는 단어나 표현을 적절하게 찾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이만큼이나 동양과 서양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