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3대 황제, 폭군 「칼리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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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게르마니쿠스

그 인기는 역대 로마 지도자 중에서도 최고였다

나중에는 로마 내에서도 최악의 평가를 받는 '칼리굴라'이지만, 황제에 취임할 당시의 인기는 역대 로마  지도자 중에서도 최고였다. 인기의 이유는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그만큼 전임 황제였던 '티베리우스'가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인기 있었지만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요절한 '게르마니쿠스'의 친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족이면서 동시에 즉위 당시에 24세로 젊은 미남 황제였던 것이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도 인기가 많았지만,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것이라고 기대되는 등 많은 인기를 누린데 반해 일찍 사망함으로 그만큼 아쉬움을 느끼는 로마 시민들이 많았을 것이다. 칼리굴라라는 것은 별명으로,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이다. 로마의 유명한 이름을 다 모아 놓은 것 같은데, 본인의 이름은 가이우스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황제혈통으로 받은 이름이며,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자리에 취임하게 되는 일종의 칭호로 볼 수 있고 게르마니쿠스는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에게서 받은 이름이다. 실질적으로 로마의 명문인 율리우스가의 피와 같은 로마의 명문인 '클라우디우스'가의 피도 잇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로마의 성골이라 할 수 있다. 티베리우스가 사망하기 전,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카프레아이의 별궁'에서 생활하였는데, 그의 사망 후 티베리우스의 시신과 함께 로마로 향하여, 원로원을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최고권력자로 취임하였다. 티베리우스가 즉위했을 때처럼 반란이 일어나거나 하진 않았는데, 티베리우스가 현직에 있을 때 시민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정책들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오히려 새 황제에게 관심과 기대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칼리굴라의 인기영합주의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고나서 시행한 정책들은 대부분 시민들이 만족할만한 것 들이었다. 로마 시민에게 유산을 나눠주고, 공공건축물을 짓는 등 과거에 약속되었지만 시행되지 않았던 정책들을 집행하였다. 또한 검투시합을 열고, 축제를 개최하는 등 많은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였다. 기본적으로 티베리우스의 정책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데, 그동안 절약가였던 티베리우스의 정책이 로마 시민들에게 불만이었던 만큼 인기를 얻었다. 티베리우스가 별궁에 틀어박혀 통치를 시행하면서 무시당했던 원로원을 방문하여 아우구스투스 시절로의 회기를 약속하기도 하고, 로마 전역에 부과되고 있던 경매세를 폐지하고, 화재로 집이 소실된 이재민들에게 보상하고 구제 대책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의 사재와 로마 예산의 지출이 증가하여,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막대한 낭비를 했다고 평가받았다.

낭비에 이은 낭비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를 모시는 신전을 건설하거나, 폼페이우스 극장을 개보수 하고, 각 도시의 성벽 및 신전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에 요새 도시 건설을 입안하는 등 각 종 인프라 계획을 발표하고 공개하였다. 새 전차 경기장을 짓기 위해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운반해 오기 위해 두척의 배를 새로 건조하고, 운송 후에는 그냥 방치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로마에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여러 항구를 건설하거나 보수하였고, '아쿠아 클라우디아'와 '아니오 노부스'같은 수도교를 건설하여 깨끗한 물이 로마로 공급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필수 불가결한 공공건축물 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결과적으로 로마의 재정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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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의 기행

서기 37년 그는 즉위한지 7개월 즈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두통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기행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티베리우스의 유언으로 자신과 공동상속자이자 조카이며 양자이기도 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숙청하였다. 각종 축제에 신의 코스프레를 하고 참가하거나, 자신을 신격화하여 새로운 태양신인 '네오스 헬리오스'라고 하며 자신의 모습과 태양신 '헬리오스'의 모습을 섞어 주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로마의 여신과 자신이 같이 있는 모습을 새기게 하거나, 여동생 사후 여동생을 미의 여신 '비너스'와 연결 지어 그녀를 신격화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동생들과 근친상간을 하였다거나 궁전에 매음굴을 만들었다거나 자신을 태워다 준 마부에게 거금을 하사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역사서에 남아있다. 하지만 사후 칼리굴라의 평가가 박한 것을 고려했을 때 당시의 역사서들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암살

서기 41년 칼리굴라는 그의 근위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에게 암살당하였다. 카시우스와 그의 일당은 약 20명 정도 였는데 노상에서 칼리굴라와 수행원들을 시해한 후, 황궁으로 들어가 황후인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와 어린 그의 딸 '율리아 드루실라'까지 죽였다고 한다. 칼리굴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도 제거하려 하였지만, 그들보다 먼저 다른 근위대장인 '아레키누스 클레멘스'의 부하들에게 발견되어 보호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카시우스가 칼리굴라를 암살한 이유가 개인적인 불화라거나, 혹은 원로원이 황제 일가를 배제하고 다시 공화정으로의 회귀를 원했다거나, 또는 권력을 얻으려는 제삼자가 배후에 있다는 등의 말들이 있다. 그러나 기록이 정확하지 않은 시기에, 그것도 상당한 혼란의 와중에 있었던 일로 그 진실을 알 수 없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던 카시우스는 후에 체포되었으나 그 전모를 밝히지 않은 채 처형되었다. 그 후 황제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에 의해 클라우디우스가 다음 황제로 추대되어 취임하게 되는데, 이후부터 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의 암살이나 추대에 빈번히 등장하게 되며 일부는 자신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는 본인을 별명으로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병을 앓은 후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하는데, 일부는 그로 인해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병을 얻었다고 하기도 하고, 어렸을때부터 주변에서 많이 봐왔던 독살이나 암살을 두려워해서 그랬다고 하기도 한다. 후대의 많은 역사가들이 그를 폭군이나 암군으로 평가하였지만 의외로 현대의 평가는 후한 편인데, 그가 진행한 정책들의 상당수가 당시의 기록들을 지금의 관점에서 추론했을 때 필요불가결한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4년에 불과해서 사실상 그의 정책이 로마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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