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영웅 「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 역사
- 2022. 12. 21.
불우한 어린 시절
'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은 1867년 러시아령 '핀란드 대공국'에서 태어났다. 만네르헤임가의 선조는 함부르크에 살던 독일인으로 17세기에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귀족이 되었다. 이후 다시 18세기에 당시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로 이주하였는데, 만네르헤임의 증조부는 핀란드 대공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으며, 백작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만넬헤임가는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부친은 사업가이자 극작가였는데, 조증과 우울증이 반복하는 양극성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고, 이후 도박에 빠져 1880년에 파산하여 부인과 가족을 버리고 애인과 함께 파리로 가서 보헤미안이 되었다고 한다. 남편의 파산과 외도의 충격을 받은 모친은 이듬해에 병사하였다. 이때 만네르헤임은 13세였었기 때문에 외삼촌이 법정후견인이 되었으며, 1882년 핀란드의 간부후보생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만네르헤임은 모국어인 스웨덴어 외에도 핀란드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배웠으나, 몰락한 집안 환경으로 외삼촌과의 갈등도 있어, 1886년에 무단외출로 반항을 하여 퇴학하게 된다. 간부후보생 학교는 군사학교였는데 퇴학당함으로 인해 핀란드 대공국군에서 입대할 수 없게 되어, 러시아 장교 훈련기관을 통해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려 하였다.
러시아 제국군 임관과 러일전쟁 참전
학교를 퇴학한 후에는 우크라이나에 옮겨 살면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헬싱키의 사립학원에 등록하여 입학시험을 통과하면서 학적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되었다. 1887년에는 니콜라이 기병학교에 진학하였는데, 졸업 당시 본래 차석의 성적이었으나 과음하여 벌인 소란으로 인하여 10등의 성적을 받았다. 졸업 후 러시아 제국군에 기병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892년에는 부유한 귀족의 영애였던 '아나스타샤 아라포바'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 참전하면서 중령으로 승진하고, '선양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비밀 첩보장교로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에 파견되었는데, 그때 막 '티베트 독립운동'을 시작할 무렵의 '달라이 라마 13세'와 만났다. 북경에 도착하여 첩보 보고서를 작성한 이후 일본에 들렀다가 상트페테르부트크로 귀환하였다. 1909년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폴란드에 주둔하였고, 이듬해 소장으로 승진해 '황제 폐하의 경호 친위 창기병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12년에 러시아 황실 수행단의 일원이 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며 러시아 제국군 내부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 혁명과 핀란드 내전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만네르헤임의 인생은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다. 전쟁에 참전한 만네르헤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싸움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4등 '스뱌토코 게오르기 훈장'을 수훈하고 이후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917년 '3월 혁명'(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공화국 정부에 의해 혁명 비지지자로 간주된 만네르헤임은 퇴역하여 고향인 핀란드의 헬싱키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까지 러시아의 속국 취급이었던 핀란드 대공국은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사실상 독립된 상태였다. 핀란드의 총리 '스빈후부드'는 귀국한 만네르헤임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핀란드 군 창설 맡기게 된다. 1917년 10월, 러시아 본국에서 '볼셰비키 혁명'(10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핀란드에서도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사회주의 진형인 '적핀란드'는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고, 만네르헤임은 정부 측의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대항한다. 스웨덴 의용병과 독일의 지원으로 내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친독일 행보를 보이는 정부 행태와 독일의 간섭에 염증을 느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였다. 1918년 독일의 압력으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매제였던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공작이 핀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불과 1달여 만에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향한다. 1918년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핀란드의 임시 섭정자격으로 연합국을 방문했고, 1919년 7월에 새로 제정된 공화국 헌법을 승인하고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간접선거의 결과 낙선하면서 공직에서 은퇴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과 말년
공직에서 물러난 마네르헤임은 인도주의 활동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핀란드 적십자사에 들어가서 활동하면서 총재를 역임하시도 하고, 아동복지협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후에는 아시아 지역으로 여행을 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 등을 방문하였으며, 네팔을 방문하였을 때는 3m가 넘는 식인호랑이를 사냥했다고 하는 일화도 남아 있어, 그 모피는 지금도 헬싱키의 만네르헤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31년에 취임한 '패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만네르헤임을 '핀란드 방위평의회 주석'으로 임명하여 핀란드의 유사시 총사령관이 되기로 결정하였고, 1933년에는 '전쟁원수'의 칭호를 받았다. 1939년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국경문제 협상이 결여되면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하면서 '겨울 전쟁'(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 시작되었고, 만네르헤임은 72세의 나이로 핀란드 방위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핀란드는 소련과의 체급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를 선언하게 되었다. 결과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맺어 당시 핀란드 영토의 10% 가까이 되는 카렐리야 지방을 소련 측에 할양하게 되어 카렐리야인들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다. 당시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있어 외부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던 핀란드는 소련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940년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스 작전'으로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핀란드 영토 내로 독일군이 행군하는 것을 요구하여 핀란드가 승인하면서, 핀란드가 독일의 동맹군으로 소련을 공격하면서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계속 전쟁'(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이 시작되면서 나치 독일은 독일병력의 핀란드 지원을 제안했지만 만네르헤임은 거절하고,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도 핀란드 군의 도시 공세에 불참하였다고 한다. 1942년 75세 생일에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원수' 칭호를 받았다. 이때 아돌프 히틀러가 만네르헤임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핀란드를 방문하여 회담하였지만, 독일군의 소련 공격에 대한 지원 요구를 만네르헤임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소련과의 전쟁은 전력이 열세로 1944년 '모스크바 휴전 협정'을 맺게 된다.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잃은 영토에 더해 새로운 영토를 할양하고, 3억 달러달한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또한 공산당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파시스트 정당을 금지하며, 핀란드 내에 있는 독일 세력을 몰아내는 것도 약속되었다. 그 결과 독일과의 사이에 '라플란드 전쟁'이 발발했지만 독일군은 핀란드를 벗어나 노르웨이 북부로 탈출했다. 이때 만네르헤임은 일어난 전쟁을 수습하고, 주축국으로 2차 대전에 참전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1944년 8월부터 1946년 3월 사임할 때까지 핀란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고령으로 위궤양으로 수술을 받고, 십이지장 궤양 등의 치료를 위해 스위스의 요양원에 입원하여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1951년 스위스 로잔의 주립 병원에서 영면, 헬싱키의 히에타니에미 묘지에 안장되었다.